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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생 100주년 맞이하는 퓰리처상의 오늘급격한 언론 환경 변화에 발 맞추며 언론계 노벨상으로서 권위 지켜
최진호 美보스턴 특파원 | 승인 2016.07.11 22:02|(196호)
1917년 뉴욕 컬럼비아 언론대학원에서 처음 제정된 퓰리쳐상 100주년을 기념해 300명 이상의 퓰리처상의 역대 모든 분야 수상자들을 초청한 첫 리셉션이 워싱턴포스트, 미 의회도서관 주최로 2016년 1월28일 워싱턴 D.C. 소재 인터랙티브 언론 박물관인 뉴지엄(Newseum)에서 열렸다. (사진=마리아 브릭/뉴지엄)

올해로 제정 100주년을 맞이하는 퓰리처상은 저널리스트이자 신문 발행인이었던 조셉 퓰리처(1847~1911)의 이름을 본따 만들었다. ‘언론계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이 상은 미국에서 가장 권위 있는 보도, 문학, 음악상으로 손꼽히고 있다. 당대에 퓰리처가 이룬 업적들은 20세기에 탄생한 TV의 발명만큼이나 중요하다고 평가되고 있다. 현대 미국 언론의 막강한 영향력은 바로 퓰리처의 손을 거쳐 성장한 것이었다. 언론은 그를 통해 비로소 국민 여론을 주도하고 행정, 입법, 사법에 이어 강력한 힘을 가진 ‘제 4부’로 거듭 태어날 수 있었다. 

 
조셉 퓰리처의 흉상 (사진=위키피디아)


거리를 전전하던 노숙자에서 최초의 언론 재벌로

퓰리처는 1847년 4월 10일 부유한 유태인 곡물 상인과 독일인 어머니 사이의 아들로 헝가리의 마코에서 태어났다. 1858년 부친 사망 후 그의 사업이 파산에 이르자 집안이 크게 기울게 되었다. 생계를 위해 나폴레옹의 멕시코 군대나 영국군의 인도 군대에 지원했지만 허약한 체질과 좋지 않은 시력 때문에 뜻대로 되지 않자 17세 되던 해인 1864년, 청운의 꿈을 안고 미국행 배에 오른다. 퓰리처는 당시 독일 함부르크에서 남북전쟁에 참전할 군인들을 모집하는 광고를 보고 대서양을 건너 보스턴에 도착했지만, 자신이 군에 입대할 때 받는 돈에서 신병 모집자들이 큰 몫을 챙겨간다는 사실을 알고는 탑승하고 있던 디어 아일랜드 선에서 몰래 빠져나와 뉴욕행 배로 갈아탄다.

뉴욕에서 200달러를 받고 육군에 입대한 그는 뉴욕 주 링컨 카발리 부대에 배치되어 8개월간 복무를 했지만 퓰리쳐는 전쟁이 끝날 때까지 영어를 잘 하지 못했다. 독일어, 헝가리어, 프랑스어를 할 줄 알았지만 자신이 속한 부대가 주로 독일인으로만 구성되어 있어 영어는 거의 배울 기회가 없었기 때문이다.

남북전쟁이 끝난 후 뉴욕으로 돌아온 퓰리처는 도시에 잠깐 머무르다 메사추세츠 주의 뉴 베드포드로 이주한다. 포경선 선원으로 대서양에서 고래를 잡던 그는 뱃일이 너무나 힘들고 지루해 결국 그만 두고 빈털털이 신세로 다시 뉴욕으로 돌아왔다. 잘 곳이 없어 길거리에 세워진 마차를 옮겨 다니며 노숙생활을 하던 그는 유일한 소지품인 손수건을 팔아 75센트를 마련해 화물기차에 몸을 싣고 미주리 주 세인트 루이스로 향한다.

세인트 루이스에 도착했던 당시를 퓰리처는 “세인트 루이스의 불빛은 나에게 약속의 땅처럼 보였다”라고 회상했다. 이 도시에서 그의 유창한 독일어는 그가 전에 뮌헨에 있을 때만큼이나 쓸모가 있었다. 당시 유럽에 불어닥친 ‘1848년 혁명’의 물결로 미국으로 이민 온 수많은 독일 인구가 세인트 루이스에 거주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퓰리처는 나귀에게 먹이를 주는 일을 구했지만 몸이 약한 그에게는 힘든 일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유명 레스토랑인 토니 파우스트에서 웨이터 일을 시작했고 그곳에서 헨리 브록마이어 같은 세인트 루이스 철학 협회의 거물 인사를 보게 된다. 헤겔 번역으로 유명했던 브록마이어를 보며 “손님들에게 프레첼과 맥주를 서빙하더라도 브록마이어의 천둥 같은 언어를 공부하리라”라고 마음먹었던 그는 실수로 쟁반을 놓쳐 손님에게 맥주를 쏟은 후 웨이터 자리에서도 쫓겨난다. 일자리 없이 놀게 된 퓰리처는 세인트 루이스 머캔타일 시립 도서관에 가서 엄청난 양의 책을 닥치는 대로 읽으며 자신에게 부족했던 영어와 법률을 공부했다.

어느 날 그는 어떤 일꾼 모집자에게 루이지애나 설탕 농장에 일자리를 소개해주는 대가로 5달러를 주었다. 다른 노동자들과 증기선을 타고 강을 따라 30마일 남쪽으로 내려간 그는 선원들이 강제로 내리게 하자 취업 사기임을 알게 되고, 세인트 루이스로 일행들과 함께 걸어서 돌아온다. 퓰리처는 이 일을 기사화해서 당시 세인트 루이스의 유력 독일어 일간지인 『베스틀리체 포스트』에 보내 신문에 실리게 되는데, 이 기사는 퓰리처가 쓴 최초의 뉴스 기사로 알려져 있다.  

1867년 퓰리처는 그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국적을 포기하고 미국 시민권을 얻는다. 도서관 내의 체스(서양 장기) 방에서 퓰리처는 체스 게임을 하는 두 신사를 지켜보다가 체스 말의 움직임에 대해 비평을 하며 두 사람의 대화에 끼어든다. 그런데 그들은 이전에 만났던 『베스틀리체 포스트』의 편집자들이었고 퓰리처의 인상 강한 용모를 알아본 편집자들을 통해 그는 기자 일자리를 얻게 된다.

아침 10시부터 새벽 2시까지 뛰어다니며 하루에 16시간씩 일하는 열정적인 기자로서 명성을 얻은 퓰리처는 4년 뒤인 1872년 거의 파산 직전이었던 『베스틀리체 포스트』 소유주들에게 회사 지분을 관리하는 일을 제안받게 된다. 당시 기자 출신으로 민주당 의원이 된 그는 베스틀리체 포스트의 지분을 3,000달러어치 사들였다가 다음해에 되팔고 7년 뒤인 1879년에는 『세인트 루이스 디스패치』와 『세인트 루이스 포스트』를 인수해 『세인트 루이스 포스트 디스패치』로 합병한다. 약관 32세의 나이에 신문사 발행인이 된 이후 퓰리처는 ‘보통사람의 챔피언’ 이미지로서 자신을 알려 대중에 어필하고, 언론계의 떠오르는 인물로 주목받게 된다.

1883년 마침내 부유한 언론 재벌이 된 그는 『뉴욕 월드』를 34만 6천 달러에 사들인다. 그는 한해 4만달러씩 적자를 보고 있던 이 신문사의 발행 부수를 늘리기 위해 신문 편집 구석구석까지 관여하며 독자들에게 흥미로운 휴먼 스토리나 유명인들의 스캔들, 센세이션한 기사 등에 지면을 할애하기 시작한다.

“신문은 옳은 것과 그른 것을 가르치는 도덕교사”라고 믿는 한편, “재미없는 신문은 죄악”이라는 신념을 가졌던 퓰리처는 미국식 자본주의가 가져올 엄청난 사회 변화를 일찌감치 내다보았다. 『뉴욕 월드』는 광고, 일러스트, 만평과 사진 등 시각적인 요소들을 화려하게 사용하고 체육부를 신설해 스포츠 기사를 비중 있게 다루었으며 흥미와 오락위주의 일요판도 처음 신설하여 대중적으로 큰 인기를 끌었다. 여기에 기술, 경영, 통계 자료도 추가하며 시민들의 생활에 신문이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도구로서 자리매김하도록 하였다.

 
미국과 스페인 간의 전쟁을 안보 상업주의로 이용한 것을 풍자한 만화. ‘황색 저널리즘’이란 말의 유래로 유명한 옐로우 키드의 옷을 입고 전쟁(War)라는 단어를 쌓아올리고 있는 언론계의 두 경쟁자였던 조셉 퓰리처와 윌리엄 허스트를 표현하고 있다. (사진=위키피디아)
 
미국 독립 100주년을 맞아 프랑스가 선물한 자유의 여신상을 받침 비용이 없어 받지 못하자 퓰리처가 더 월드 지면을 통해 최초의 크라우드 펀딩 모금 운동을 하여 10만 달러가 넘는 성금을 성공적으로 모았다. (크라우드 펀드 인사이더 닷컴)


황색 저널리즘인가, 사회의 공기인가?

1889년 만화가 리차드 아웃컬트를 영입해 ‘더 옐로우 키드’라는 사상 최초의 컬러 시사만화를 일요판에 소개한 『뉴욕 월드』는 퓰리처의 리더십 아래 15,000부이던 발행부수를 600,000부까지 끌어올려 미국 내 신문 중 최대의 발행부수를 자랑하게 된다. 하지만 이를 흉내낸 윌리엄 허스트의 『뉴욕 저널』과의 과도한 선정주의 싸움으로 인해 ‘더 옐로우 키드’는 ‘황색(옐로우) 저널리즘’이란 말의 시초가 되기도 한다. 이 이야기의 전말은 윌리엄 허스트가 『뉴욕 월드』의 간판 상품인 ‘더 옐로우 키드’의 작가를 『뉴욕 저널』에 쓰기 위해 스카우트해 가자 퓰리처가 다시 그를 데리고 오며 사상 유례없는 ‘만화전쟁’으로 치고 박는 선정성 싸움으로 번지게 된 것이었다.  

황색 저널리즘은 1898년 미국 군함 메인 호의 침몰로 안보 상업주의적인 모습까지 보여준다. 당시 쿠바 아바나 항에 정박해 있던 메인 호가 폭발하며 266명의 미 해군이 사망한 사건이 발생한다. 쿠바를 지배하고 있던 스페인과 미 해군의 공동 조사가 신중하게 진행되고 있었고, 스페인이 완강히 부인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허스트의 『뉴욕 저널』은 『뉴욕 월드』에서 상호를 바꾼 라이벌 신문사 『더 월드』를 뛰어넘기 위해 스페인의 기뢰가 원인이라고 지목하며 선방을 쳤다. 『뉴욕 저널』이 ‘스페인을 지옥으로!’, ‘메인호를 잊지 말라!’ 등의 선정적인 제목으로 여론을 선동하자 이에 질세라 퓰리처의 『더 월드』도 스페인의 공격을 기정사실화하며 전쟁으로 몰아쳐 갔다.

미국 전체가 애국주의로 여론이 들썩이자 미 의회는 쿠바에 대한 군사 개입을 허용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고 맥킨리 대통령이 서명하면서 곧바로 미국과 스페인 간의 전쟁이 시작되었다. 미국이 승리하며 쿠바인들은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하게 되었지만 사실상 쿠바는 미국의 영향력 안에 들어가게 되었다. 메인 호 사건은 1세기가 지난 지금도 스페인이 관련 사실을 부인하고 있는 가운데 황색 저널리즘의 대표적인 예로서 회자되고 있다.  

그는 신문 발행인으로서의 막강한 영향력으로 자신의 진보적인 정치 의제를 추진하고 여러 정적들을 제압하기도 했다. 1908년 불거진 파나마운하 건설예산 횡령 의혹을 『더 월드』가 보도한 사건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이 보도가 나가자 퓰리처는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명예훼손으로 투옥될 위기에 처한다. 당시 루스벨트는 1880년 프랑스 정부가 시작했으나 2만 명의 사상자를 내는 막대한 인명 피해와 파산으로 끝내지 못한 파나마운하 건설을 이어받아 자신의 임기 내 최대 현안으로서 의욕적으로 추진하고 있었다. 이를 위해 상원의 승인을 받아 4,000만 달러의 연방예산을 지출했는데 이 돈이 프랑스계 기업으로 넘어갔다는 것이 보도의 핵심이었다.

애초에 보도의 전말을 모르고 있었던 퓰리처는 격노한 대통령과 정부가 무리하게 기소를 강행하려고 하자 기자들과 행동을 같이 하기로 한다. 하지만 당시 연방법에는 명예훼손으로 처벌할 만한 조항이 없었다. 루스벨트는 “무슨 수를 쓰던지간에 퓰리처를 뉴욕 대배심 법정에 세우라”고 법무장관을 닥달했다. 대통령의 성화에 못이겨 연방검사들은 사문화된 법전까지 찾아내 퓰리처를 기소하려 시도했으나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살아 있는 권력과 언론 재벌의 첨예한 대결로 번진 이 사건을 통해 미국 사회에서 언론이 사회의 공기(公器: 사회 구성원 전체가 사용하는 도구)로서 자리잡는 계기가 되었다.   

허약한 체질에 지나치게 예민하고 꼼꼼한 성격으로 인해 격무에 시달리던 퓰리처는 말년에 과로로 시력을 잃고 이명 현상에 시달리며 우울과 불면증으로 극심한 고통을 받았다. 결국 자신의 아들에게 신문사를 물려주고 은퇴 후에는 번잡한 세상을 등지고 미식 축구장 길이의 호화 선박 리버티 호를 건조해 죽을 때까지 고요한 바다에서 머물며 생활하기도 했다.  

“저널리즘에 몸 담고 있는 사람들이 최고의 지적 훈련을 받을 수 있도록 지원하고 싶다”는 유언을 남기며 50만 달러를 기탁한 퓰리처는 결국 자신의 리버티 호 위에서 1911년 조용히 눈을 감았다.

미국 언론은 “진실을 전달하기 위해 노력한 언론인”으로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사설을 싣고 언론계에 그가 남긴 업적을 기렸고, 6년 뒤인 1917년 마침내 풀리처상이 탄생했다. 그 이후부터 퓰리처가 10대에 장티푸스로 세상을 떠난 딸과 언론을 위해 2만 2천 달러를 기부해 세운 뉴욕 컬럼비아 언론 대학원에서 매년 퓰리처상 선정위원회가 열려 언론, 문학, 음악 분야의 언론 스타들을 발굴해 퓰리처상을 수여하고 있다.

 
뉴욕 타임스의 이장욱 기자가 촬영해 퓰리처상을 수상한 <테러리스트의 뉴욕 공격과 그 이후> (사진=뉴욕 타임스)


‛보도의 탁월함’이라는 선정 기준은 변하지 않아

처음 제정되었던 1917년 당시 퓰리처상은 저널리즘 3개 부문, 기타 7개 부문 총 10개 부문이 있었다. 1세기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저널리즘에서만 11개 부문이 추가되어 언론 환경이 크게 변화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어떤 보도가 가장 탁월한 보도인가’라는 모범을 현재와 미래의 기자들에게 제시한다는 선정 기준만큼은 지금도 그대로이다.

가장 큰 변화는 2006년에 있었는데 ‘반드시 신문사 웹페이지에 출판된 작품’에 한정하기는 했지만 데이터베이스, 인터랙티브·인포그래픽, 동영상 등 온라인 출판물을 심사 대상에 포함시킨 것이었다. 급격히 변하는 미디어의 지각변동에 대응하지 못한다는 비판에 직면한 퓰리처상은 마침내 2009년 온라인 매체에도 문호를 개방하고 2012년에는 ‘속보사진 부문’에 미국이 아닌 프랑스 AFP통신사의 작품을 선정하기도 했다.

 
포스트 앤 커리어 기자들이 뉴스룸에서 자신들의 2015년 공공 서비스 부문 퓰리처상 수상 소식에 크게 기뻐하고 있다. (사진=그레이스 비 엄/포스트 앤 커리어)

퓰리처상 선정위원회는 언론인과 학자, 예술가 등 총 18명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들은 하루가 다르게 진화하는 미디어의 환경 변화를 예의 주시하며 필요에 따라 수상 규정을 개정해 보다 현실적인 저널리즘 방향을 선도하고 있다. 2010년에는 멀티미디어 스타일의 기사양식을 장려하고 한 기사에 대한 수상 가능한 기자 수를 5명으로 늘린다는 개정안을 내놓아 보다 다양한 표현 양식을 권장하겠다는 취지를 보여주기도 했다.

미국 이외의 해외 언론에는 거의 개방하지 않는 보수적인 면을 가진 것이 아쉽기는 하지만 퓰리처상은 미디어의 지각변동에 계속 발 맞추어 나가면서 세계적인 ‘언론계의 노벨상’으로서의 권위를 오늘날에도 유지하고 있다. 한국 언론인들도 퓰리처상 수상자들의 보도에 필적하는, 보다 다양하고 현장성 있는 심층 보도를 해주길 기대해 본다. 퓰리처가 남긴 “우리의 국가와 언론은 흥망성쇠를 함께할 것이다”라는 말처럼 국가와 사회를 지키는 공기로서의 역할을 잊지 않으면서 말이다.

최진호 美보스턴 특파원  jchoi8@berklee.ed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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