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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인당 국민소득 66달러에서 28,180달러까지 오른 위대한 대한민국광복 70주년 맞아 세계10대 경제대국으로 부상한 대한민국 새 역사를 다시 쓰다
장우호 기자 | 승인 2015.08.05 17:43|(185호)
   
▲ 1945년 8월 15일 광복과 더불어 서대문 형무소에서 출옥한 독립투사들과 만세를 부르는 군중들(좌)과 2015년 3월 1일 서대문형무소역사관에서 열린 '서대문, 1919 그날의 함성!'행사에 참석자들(우).
한반도는 36년간의 일제 식민 치하에서 벗어난 뒤 50여 개의 정당 단체가 생겨난 사회의 혼란, 평균 300%에 이르는 물가상승의 압박, 정계의 거물들을 앗아간 테러리즘의 횡행, 그리고 사회 곳곳을 누빈 좌우의 충돌 등 건국을 위한 뼈아픈 3년을 보내야만 했다. 이후 가혹한 독재 군정과 유약한 민주주의가 반복되는 역사를 거듭했지만 첫 여성 대통령 배출, 한류열풍 등 정치적, 문화적, 경제적으로 세계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국가로 변모했다. 1953년 1인당 국민소득(GNI)는 66달러에서 2014년 28,180달러로 400배가 증가하는 등 고속성장을 달성했고 세계 7위의 군사력을 자랑하며 자주국방의 꿈도 이뤘다

   
▲ 1945년 10월 24일 36년간 영화를 누리다 현해탄을 건너기 위해 부산항에서 배에 오르는 일본인들.
광복, 그 순간
1945년 8월 15일 정오 일본 천황 히로히토(裕仁)는 방송을 통하여 “우리 제국이 여러 나라 정부의 공동성명 조건을 수락할 것을 통고시켰노라”고 무조건 항복을 내외에 선포했다. 이로써 일본의 패전은 확정되고 제2차 세계대전이 종말을 고하며 1910년(융희 4년) 8월 29일 경술국치조약이 있은 지 꼬박 36년 만에 군국적(軍國的) 학정(虐政)을 물리치고 나라를 되찾았다. 1943년 12월 카이로선언(“한국 인민의 노예 상태에 유의하여 적당한 시기에 한국을 자유, 또 독립게 할 것을 결의한다”)과 1945년 7월 포츠담선언(“일본의 주권은 혼슈·本州, 홋카이도·北海道, 규슈·九州, 시코쿠·四國와 연합국 측이 결정한 제소도에 국한된다”) 등 국제조약과 기나긴 독립항쟁 끝에 보람을 거두게 된 것이다.
하지만 광복의 기쁨 속에 이미 분단의 씨앗이 싹을 틔우고 있었다. 케네디 정부 시절 국무장관을 지낸 딘 러스크(Dean Rusk)의 냉전비망록 <내가 본 대로(As I saw it)>에 따르면 ‘38선’은 1945년 8월 10일 전쟁부 정책과장 본스틸(Charles Bonesteel)과 함께 일본이 항복 의사를 표명한 당일 자정 무렵 소련이 한반도 전역을 점령하려는 것을 급히 막고자 그은 군사분할선이다. 즉 우리 민족의 자주적 의사와는 관계없이 몇몇 전승 강대국의 군사적 편의에 따라 그어진 선으로 일본 치하에서의 광복이 완전한 해방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1945년 12월 16일부터 25일까지 미국·영국·소련 3국의 외무장관이 참석한 모스크바 외상 회의에서 채택된 협정은 우리나라 역사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한국이 독립국가로의 능력을 갖출 때까지 돕는다는 구실 아래 미국과 소련은 각각 4개국 대표에 의한 신탁 통치와 민주주의적 임시 정부 수립을 제안했다. 그리고 영국이 이에 동의함으로써 한국에 임시 민주정부를 수립하고 미·영·중·소에 의한 5년 기한의 신탁 통치가 결정됐다.
광복을 곧 민족자결(民族自決)이라 여겼던 국민에게 신탁 통치는 청천벽력과도 같았다. 따라서 거국적으로 반탁투쟁을 벌였으나 이듬해 1월 3일을 기점으로 조선공산당 등 좌익이 모스크바 협정을 지지하며 좌우 진영 간 대립이 심해졌다.
 
민주 국가로의 변모
신탁 통치의 찬반으로 인해 완전히 대립하게 된 좌·우익은 1946년 3·1절을 맞아 좌익은 남산에서 3·1절 기념 시민대회를, 우익은 서울운동장에서 을미선언 국민대회를 따로 거행했다. 이어 시가행진도 따로 가졌는데 남대문 앞에서 좌익의 민청과 우익의 학련이 충돌했으나 경찰에 의해 곧 진압됐다. 이 과정에서 우익 측 2명이 사살되고 4명이 중상을 입었다.
이후 1948년 4월 3일 제주도에서 무장봉기가 발발했다. 350여 명의 남로당 제주도당 무장대가 새벽 2시를 기해 제주도 내 12개 지서를 공격하고 우익단체 요인의 집을 습격하면서 경찰 4명, 민간인 8명, 무장대 2명의 사상자를 냈다.
좌·우익 간의 거리가 좁혀질 기미를 보이지 않은 채 UN결의에 따라 공포한 총선거가 있는 5월 10일이 됐다. 한반도 역사상 처음으로 치르는 보통, 평등, 직접, 비밀 선거였다. 특히 국회의원을 뽑는 데만 그친 것이 아니라 나라의 수장인 대통령을 뽑고 나라를 세우는 첫 단계라는 점에서 유권자나 후보자나 모두 의욕과 사명감에 차있었다. 다만 독립 후 최초의 선거가 UN한위의 감시 하에 실시됐다는 것은 선거의 공정성을 국제적으로 확인하는 의의도 있었지만 동시에 민족의 수난을 그대로 반영한 것으로도 볼 수 있다.
 
   
▲ 1947년 5월 25일 한 미군 병사가 미·소 진주군의 경계선을 이루는 도로 위에 38이라는 숫자를 표시하고 있다.
38선이 휴전선으로…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북한군은 ‘폭풍’이라는 공격명령과 함께 서쪽의 옹진반도부터 개성, 전곡, 포천, 춘천, 양양 등 4개 축선 11개 지점에 이르는 38선 전역에서 전면 남침을 개시했다. 북한군의 남침이 있은 지 정확히 하루 만인 26일 새벽 4시(한국시간) UN안보리가 소집됐다. UN안보리는 “북한군의 즉각적인 전투행위 중지와 38도선 이북으로의 철수를 요구”하는 결의안을 채택했다.
이후 6월 29일 맥아더사령부의 투입, 7월 7일 UN군 편성,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 1951년 1월 4일 1·4후퇴 등을 겪었다. 중공군은 1951년 1월 8일을 전후로 모든 전선에서 일제히 공세를 멈췄고 국군과 UN군은 서울을 재탈환했다. 엄청난 희생과 피의 대가가 고작 전쟁 직전 상태로의 협상이라는 데 국내 민심은 분노했지만 약 2년간의 휴전회담을 거쳐 1953년 7월 27일 오전 10시 제159차 본회의장인 판문점 정전협정 조인식장에서 정전협정이 체결되며 6·25전쟁은 막을 내렸다.
고정선(固定線)으로 간주됐던 38선은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유동적인 휴전선(休戰線)이 생겼다. 3년간의 전쟁으로 국군 62만 명, UN군 16만 명, 북한군 93만 명, 중공군 100만 명, 민간인 250만 명, 이재민 370만 명, 전쟁미망인 30만 명, 전쟁고아 10만 명, 이산가족 1,000만 명 등 당시 남북한 인구 3,000만 명의 절반을 훌쩍 넘는 1,900여만 명이 피해를 입었다.
 
   
▲ 좌측부터 대한민국 제1~3대 이승만 대통령, 대한민국 제4대 윤보선 대통령, 대한민국 제5~9대 박정희 대통령, 대한민국 제10대 최규하 대통령.
독립운동가의 야욕
이승만은 1945년 광복이 되자 그해 10월 귀국해, 우익 민주진영의 최고지도자로 독립촉성중앙협의회 총재, 민주의원 의장 등을 지내면서 좌익세력과 투쟁했다. 1946년 6월 남한 단독정부 수립 계획을 발표하며 한국의 독립 문제를 협의하기 위해 미국에 건너가 미국정부의 대한(對韓)정책에 영향력을 행사했다.
1948년 제헌국회의원에 당선, 이어 국회의장으로 피선돼 대통령중심제 헌법을 제정·공포했다. 그해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에 취임했으나 6·25전쟁 중인 1952년 임시수도 부산에서 제2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재선이 어렵게 되자 계엄령을 선포하는 등 변칙적 방법을 동원해 헌법을 대통령직선제로 개정하고 재당선됐다. 이승만 대통령은 1960년 3월 15일 부정선거로 4선 대통령이 됐으나 4·19혁명으로 사임했다.
1960년 4월 18일 고려대학교 학생 3천여 명이 3·15부정선거에 항거하기 위해 학원의 자유 보장 등을 요구하며 고려대학교에서부터 국회의사당까지 시가행진을 한 뒤 국회의사당 앞에서 연좌데모를 벌이다가 유진오 고려대학교 총장의 만류로 오후 6시 40분경 데모를 중단하고 학교로 돌아가던 중 종로 4가 천일백화점 앞에서 흉기로 무장한 100여 명의 괴한에게 피습을 당한 사건은 4·19혁명의 불씨가 됐다.
 
9개월간의 민주당 집권
이승만 독재정권이 4월 혁명으로 인해 무너지고 대통령에 윤보선, 국무총리에 장면이 선출됐다. 제2공화국은 영국식 의원내각제를 모방해 대통령은 의례적인 국가 원수로 하고 정치적 실권은 국무총리에게 집중시켰다. 대통령중심제를 채택했던 제1공화국의 1인 독재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4·19혁명의 이념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의원내각제를 채택해야 한다는 것이 당시 사조(思潮)였다.
4·19혁명의 주도세력이었던 학생과 언론은 독재정권을 무너뜨리고 민주정부를 수립하는 데 큰 공헌을 했지만 유약한 민주정부를 지원하고 돕는 데에는 기여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사회혼란을 지속적으로 야기시켰다. 그리고 학생단체 파벌 간의 갈등과 부패는 국민들의 지탄의 대상이 되기에 이르렀고 때를 노리고 있던 군부세력을 쿠데타로 이끌어내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경제 개발에 건 정당성
1961년 5월 16일 박정희 소장을 앞세운 군부세력이 새벽 해병대 공수부대 및 보병 33사단으로 구성된 5천 명의 쿠데타군이 한강을 도하해 서울에 진입해, 쿠데타는 무혈 성공했다. 혁명군은 곧 육군 본부에 군사혁명위원회를 두고 혁명공약 6장을 발표하고 전국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하는 한편 입법·행정·사법의 3권을 장악했다.
군사위원회는 이날 오후 포고 제4호로 장면 정권의 인수를 정식으로 선언하는 한편 국회 양원의 해산과 일체의 정치활동을 금지했다. 또 장면 정권의 국무위원 및 정무위원의 체포를 발표했다. 5월 18일 장면 총리는 국무회의를 개최해, 비상계엄을 추인하고 총사퇴를 의결했다. 이날 윤보선 대통령도 비상계엄을 추인함과 함께 군사혁명에 대한 협력을 전 국민에 호소했다. 이로써 군사혁명위는 장면 정부로부터 정권을 인수하게 됐다.
5·16 이후 당시 국무총리 김종필은 군정을 끌고 갈 5개의 기구를 생각했다. 내각, 국가재건최고회의, 경제기획위원회, 국민운동본부 등 4개의 행정 및 사회기구와 상기 정책기관에 필요한 정보수집을 목적으로 한 중앙정보부(KCIA)가 포함됐다.
박정희 정권은 7월 7일 5·16쿠데타 이전 또는 이후의 반국가·반민족행위사건, 반혁명행위사건과 제2공화국 때의 기결 및 공판계속중인 사건 등을 처리하기 위한 혁명재판소 및 혁명검찰부를 설치했다. 혁명재판 심판부의 판결 건수는 총 205건으로 영구미제 3건을 제외한 모든 사건의 심판을 완료하고 1962년 4월 27일을 최후공판으로 하여 9개월 반 만에 끝을 맺었다.
한편 박정희 정권은 5·16쿠데타의 정당성을 찾기 위해 경제 성장에 사활을 걸었고 1960년대 경제적으로 괄목할 만한 성과를 보였다. 집권 직후인 1962년부터 1971년까지 10년간 연평균 9%의 경제성장률을 달성함으로써 박정희 정부는 그 업적에 의한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었다.
1979년 10월 26일 중앙정보부장 김재규가 박정희 대통령을 시해함으로써 16년의 군사정권이 막을 내렸다.
 
   
▲ 좌측부터 대한민국 제11~12대 전두환 대통령, 대한민국 제13대 노태우 대통령, 대한민국 제14대 김영삼 대통령, 대한민국 제15대 김대중 대통령.
신군부(新軍部)의 등장과 민주화 운동의 분수령
10·26사건이 일어나 박정희 대통령이 암살된 뒤 합동수사본부장을 맡고 있던 보안사령관 전두환과 육군참모총장이자 계엄사령관인 정승화 간에는 사건수사와 군 인사 문제를 놓고 갈등이 있었다.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세력은 군부 내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하여 정승화가 김재규로부터 돈을 받았다고 주장하고 10·26사건 수사에 소극적이고 비협조적임을 내세워 정승화를 강제 연행하기로 계획했다.
한편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의 연행에 저항할지 모르는 특전사령관 정병주, 수경사령관 장태완, 육군본부 헌병감 김진기는 보안사 비서실장 허화평이 유인해 연희동 요정의 연회에 초대됐다. 연회 도중 총장의 연행사실이 전해지자 정병주·장태완 등의 육군장성들이 대응태세를 갖추려 하였으나, 이미 전두환이 박희도와 장기오에게 지시하여 국방부와 육군본부를 점령하게 함으로써 육군지휘부를 무력화시킨 후였다.
이와 같은 일련의 사태진전은 당시 대통령 최규하의 재가 없이 이루어졌다. 사후 승인을 받기 위하여 신군부세력은 최규하 대통령에게 압력을 가했으나 거절당했다. 이에 신군부세력은 국방장관 노재현을 체포하여 그를 통해 대통령이 총장 연행을 재가하게 설득했고 결국 최규하 대통령이 13일 새벽 정승화의 연행을 재가하며 이후 신군부세력은 제5공화국의 중심세력으로 등장하였다.
그리고 1980년 봄 신군부의 정권 찬탈을 저지하기 위한 학생운동이 일어났다. 이러한 학생운동은 학생회 부활운동에서 시작해 학원민주화투쟁을 거쳐 계엄해제와 유신잔당의 퇴진을 겨냥한 대대적인 정치투쟁으로 발전했으나 그 결과는 계엄령의 확대였다. 제주를 포함한 전국비상계엄은 5월 17일 오전 전군지휘관회의에서 결의하고 국무회의에서 8분 만에 통과됐다. 신군부는 계엄 확대 조치가 있기 2, 3일 전 공수부대를 
   
▲ 1980년 5월 19일 광주 금남로에서 전투경찰에 잡힌 시위대원이 피투성이가 된 채 끌려가고 있다.
대학이 있는 전국 주요도시에 배치했으며 17일 자정을 기해 대학교, 관공서 등에 계엄군이 주둔했다.
5월 18일 아침 전남대 정문 앞, 계엄군과 학생 사이의 충돌로 인한 학생들의 시내 진출이 광주항쟁의 첫 도화선이 됐다. 흩어지는 학생들을 골목까지 뒤쫓아 곤봉으로 구타하고 차에 태워 어디론가 싣고 가는 등 광주 곳곳에서 계엄군의 잔인한 만행이 시작됐다.
5·18민주화운동은 4·19혁명과 부마항쟁의 연장선상에 있는 동시에 6월 민주항쟁으로 이어지는 민주화 운동의 분수령으로서 그 역사적 의의가 크다. 광주항쟁의 특이점은 자위수단을 가졌다는 것이다. 식민통치 하에 있었던 광주학생운동이나 해방 이후 3·1운동, 4·19혁명 등 근·현대사 민중항쟁이 비폭력적 항쟁에 그친 반면 19세기 갑오농민전쟁 이후 5·18민주화운동은 최초의 무장항쟁이었다는 것이다.
대한올림픽위원회(KOC)는 1981년 2월 26일 올림픽 유치 신청서를 IOC 본부에 접수시켰다. 당초 불가능할 것으로 여겼던 올림픽 유치는 9월 30일 사마란치 IOC 위원장이 1988년 올림픽 개최지로 서울이 선정됐다는 발표를 하며 성공적으로 이뤄졌다. 다음 해인 1982년 한국프로야구위원회(KPBC)가 창립됐고, 6개 구단으로 리그를 시작했다.
전두환 정권은 광주항쟁을 무력으로 진압하고 집권 7년 동안 경상도 출신을 대거 중용한 반면 호남 출신은 배제했기 때문에 호남인의 반정부감정과 반영남감정을 심화시키는 등 지역적으로 편향된 정권이자 지역분할을 조장한 정권으로 평가받았다.
 
제6공화국
노태우 정부는 1987년의 6월 항쟁의 결과로 성립된 제6공화국의 첫 번째 정부이다. 제13대 대통령 노태우는 득표율 36.64%로 통일민주당 김영삼(28.03%), 평화민주당 김대중(27.04%)를 이기고 대통령에 당선됐다. 민주정의당 대표 시절 노태우는 6월 항쟁으로 계속된 국민들의 민주화 요구를 수용하여 6·29선언을 발표했고 이를 계기로 5년 단임의 대통령 직선제를 골자로 하는 헌법이 마련되었다.
노태우 정부는 소비에트 연방(소련), 중국 등 공산주의 국가들과 외교 관계를 수립하는 이른바 북방 정책을 추진하였다. 또한 UN에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함께 가입해 남북 고위급 회담이 열리고 문화·체육의 교류가 이루어지는 등 적극적인 대북 외교를 펼쳤다.
 
문민의 시대
제14대 대통령 김영삼은 득표율 41.96%로 민주당 김대중(33.82%)을 꺾고 문민정부(文民政府)를 출범했다. 김영삼 정부는 집권 초기 개혁과 공직자들의 재산 등록과 금융 실명제 등을 법제화하여 비리 일신 정책을 펼쳤고 5·16쿠데타 이후 중단되었던 지방자치제를 전면적으로 실시했다. 또 1995년 11월 16일 노태우 전 대통령을 수천억 원 규모의 비자금 사건으로, 12월 3일 전두환 전 대통령을 군사반란수괴혐의로 각각 구속 수감했다.
1994년 남북 정상 회담을 위한 예비 접촉이 이루어져 남북 관계가 진전될 기미를 보였지만 김일성의 사망으로 남북 정상 회담이 무산되고, 김일성 조문 문제로 남북관계는 다시 냉각됐다. 임기 말인 1997년 12월 3일 국가부도 위기에 처한 대한민국이 국제통화기금(IMF)으로부터 자금을 지원받는 양해각서를 체결했다. 당시 태국, 홍콩, 필리핀 등 동남아시아의 연쇄적
‘외환위기’ 속에 대한민국 정부의 외환관리정책 미숙과 실패가 직접적인 원인이 됐다. 당시 대통령 김영삼은 1997년 11월 10일 강경식 경제부총리와의 통화 이전까지 외환위기의 심각성조차 모르고 있었다는 보도가 나와 크게 비난받았다.
많은 회사들의 부도 및 경영 위기가 나타났고 대량 해고와 경기 악화로 인해 대한민국의 온 국민이 큰 어려움을 겪었다. 이후 대한민국의 부채를 갚기 위해 금모으기 운동이 전국적으로 일어났다. 정부가 국민의 금을 매매가보다 높게 사들여 해외로 팔았다. 전국 약 350만 명이 참여한 이 운동으로 약 227톤의 금이 모였으며 국가경제의 어려움 속에서 국민들이 자발적으로 희생정신을 발휘한 대표적 사례가 됐다. 이 사건을 계기로 제15대 대통령 선거에서 정권 교체가 이뤄졌다.
 
   
▲ 좌측부터 대한민국 제16대 노무현 대통령, 대한민국 제17대 이명박 대통령, 대한민국 제18대 박근혜 대통령.
여(與)에서 야(野)로 흐른 민심
선거를 통한 사상 최초의 평화적인 여야 정권 교체를 이룬 김대중 정부는 세 번의 출마 끝에 40.27%의 득표율로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38.74%)를 누르고 수립됐으며 국민의 정부로 불렸다. 외환위기 극복과 민주주의와 시장 경제 병행 발전을 목표로 했으며 이를 위해 국정 전반의 개혁, 경제난의 극복, 국민 화합 실현, 법과 질서 수호 등을 국가적 과제로 제시했다. 또한 남북 화해 협력 정책을 추진하여 남북 교류를 크게 활성화했다. 이어 2000년 6월 15일 남북 정상 회담을 통해 6·15남북 공동선언을 발표하고 남북 이산가족이 만나는 등 남북 간의 긴장 완화와 화해 협력을 진전시켰다.
2002년 5월 31일부터 21세기 최초의 월드컵이자 아시아에서 처음으로 열리고 대한민국과 일본이 공동개최한 제17회 FIFA 월드컵이 개최됐다. 한국 국가대표 경기가 있는 날 범죄가 30.8% 줄어드는 등 온 국민이 하나 되는 축제의 장이 되어 한국이 4강 신화를 이룩하는 쾌거를 남겼다. 하지만 호사다마라 했던가, 1999년 6월 15일 있었던 제1 연평해전에 이은 2002년 6월 29일 제2 연평해전이 발발하면서 김대중 정권에서 주장한 ‘햇볕정책’이 안보에 큰 구멍을 낸 것 아니냐는 지적을 받기도 했다.
노무현 대통령은 48.91%의 득표율을 보이며 지난 대통령 선거에 이어 재출마한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46.58%)와의 각축 끝에 제16대 대통령에 당선됐다. 노무현 정부는 참여정부로 불리면서 국정 목표를 국민들과 함께 하는 민주주의, 더불어 사는 균형 발전 사회, 평화와 번영의 동북아시아 시대 등을 제시하였고, 참여정부는 권위적 정치문화의 극복과 지역구도 청산, 지방분권, 지역균형 발전 등에 노력을 기울였다. 그리고 남북관계를 더욱 개선시키려는 노력도 기울여 2007년 남북 정상 회담이라는 결과를 가져왔으나 한미FTA, 4대 개혁 입법 등에 있어서 좌·우익 모두에게서 비판을 받기도 했다. 또 위헌 논란을 겪어가면서 충남 연기군 전역과 공주시 및 충북 청원군 일부를 세종특별자치시로 설치했다.
퇴임 후 2009년 검찰의 정관계 로비 수사가 전방위로 확대되면서 노무현 대통령의 측근 세력들이 수사 대상에 오르게 되고 박연차와 친분이 있던 노무현 대통령의 가족들이 금전을 수수했다는 포괄적 뇌물죄 혐의를 받아 조사를 받았다. 노무현 대통령은 그해 5월 23일 자택 뒷산인 봉화산 부엉이 바위에서 투신자살했다. 사후 1주일 동안 봉하마을에는 전국에서 400만 명의 추모객들의 발길이 이어졌고 국민장으로 치러졌다.
 
수완 좋은 사업가형 대통령
제17대 대통령 선거는 이명박 대통령의 독주였다. 당시 한나라당 이명박 후보는 대통합민주신당 정동영 후보(26.14%)와 20% 이상의 차이를 보이며 득표율 48.67%로 당선됐다. 이명박 정부는 ‘작은 정부 구축’을 위해 정부조직을 대대적으로 통폐합하여 개편안을 발표하였으며 ‘작은 정부, 큰 시장’을 큰 골자로 한 경제살리기를 목표로 했다. ‘한미 쇠고기 협상 논란’과 함께 시위에 대한 과잉 진압과 언론 탄압 의혹 등에 휩싸이기도 했다. 이 외에도 천문학적인 재정이 투입된 4대강 사업 등으로 재임 중 최저 7.4%의 지지율을 기록하기도 했다.
 
   
▲ 박근혜 대통령이 지난 7월 24일 오전 창조경제혁신센터장 및 지원기업 대표 간담회에 참석해, 영상물을 시청하고 있다.
아시아 최초의 여성 대통령
2012년 12월 19일 ‘선거의 여왕’ 박근혜가 대한민국 제18대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전국투표율 75.7%로 꾸준히 하락하던 대선 투표율에 첫 반등을 기록하며 15대 대선 이후 최고 투표율을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18대 대선은 새누리당 박근혜 민주통합당 문재인 두 후보에게 99.6%의 표가 쏠리는 등 끝까지 알 수 없는 팽팽한 대결을 펼쳤다. 투표 결과 박근혜 당선인이 득표율 51.6%로 문재인 후보(48.0%)를 이기며 대한민국 최초의 여성대통령이자 제6공화국 처음으로 과반 대통령이 됐다.
박근혜 정부는 ‘창조 경제’를 내세우며 출범했지만 이후 연이은 대형악재를 맞으며 아직 이렇다 할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다. 2014년 4월 16일 세월호 침몰사고로 1년 여를 사태 수습에 전념하였고, 세월호 사고가 마무리되어가자 2015년 5월 20일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국내 첫 메르스 환자 발생으로 전 국민이 힘겨워했다.
하지만 박근혜 정부는 2015년 7월 24일 출범을 완료한 전국 17곳의 창조경제혁신센터를 통해 위기 뒤 찾아오는 기회를 잡으려 하고 있다. 창조경제혁신센터는 지역 주도로 선정된 특화 전략산업 분야의 중소·중견기업의 성장 및 글로벌 진출을 위한 기관·프로그램을 연계 및 총괄하는 기능을 수행하며 각 센터는 지역별 특성과 전담 대기업의 전략 분야에 맞춰 특화산업 육성, 창업 독려, 지역 벤처·중소기업 성장 지원 등을 중점 추진한다. 정부 주도 17곳과 포스코 주도 1곳을 포함한 총 18곳의 혁신센터가 박근혜 정부와 대한민국에 어떤 영향을 끼칠지 기대와 우려가 집중되고 있다.

 

장우호 기자  koreana37@mjk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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