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지난 4월 29일 일본 정상으로는 처음으로 국빈 자격으로 미 의회에서 ‘희망의 동맹으로(Toward an Alliance of Hope)’라는 제목으로 상하원 합동 연설을 했다. 일본 내에서 ‘강한 안보’와 ‘경제 회복’을 기치로 보수층의 지지를 얻고 있는 아베 총리는 “서로 전쟁을 했던 일본과 미국이 이제 화해를 달성하고 인류가 직면한 도전에 함께 대응하게 되었다”고 말하며 미·일 동맹이 상호 간의 경제성장과 번영의 기초가 될 것이라는 점을 크게 강조했다. 또한 테러리즘, 질병, 자연재해, 기후 변화 등을 언급하면서 “미·일 동맹이 새로운 도전에 공동으로 대응할 때가 되었다”고 덧붙였다.

이어 그는 “우리는 전쟁에 대한 깊은 반성의 마음으로 전후를 시작했다”고 말하며 “우리의 행위가 아시아 국가의 국민에게 고통을 주었다”고 언급했다. 하지만 ‘사죄’라는 단어를 일부러 피하고 “전 일본 총리들의 (사죄)담화를 전체로서 계승한다”는 모호한 표현만을 남겼음에도 10차례가 넘는 미 의원들의 기립박수를 받았다. 또한 그는 해양안전보장과 관련해, “일본은 세계의 평화와 안정을 위해 최선을 다 할 것이다”라고 강조하면서 “태평양과 인도양까지 넓은 바다를 법의 지배가 관철하는 평화로운 바다로 삼아야 한다”고 하여 의도적으로 중국을 견제하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

아베 총리는 특히 한국정부가 지속적으로 사죄를 요구해온 위안부 문제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은 채 뜬금없이 ‘인간 안보’를 거론한 부분에서 “무력분쟁은 여성들을 가장 고통스럽게 만든다. 우리 시대에, 여성들이 인권학대로부터 자유로운 세상을 실현해야 한다”고 말했다. 바꿔 말하면 다른 나라도 모두 전쟁하면서 여성들이 피해를 많이 입었는데, 유독 일본만 가지고 잘잘못을 따지냐는 식이었다.

평소에 아베 총리는 종군 위안부의 존재를 ‘소설 속의 이야기’라고 치부하고 ‘공창제에서 일한 자의적 매춘부들’이라고 지칭하면서 일본의 침략역사를 정당화하는 망언을 서슴치 않아왔다. 그는 이 연설을 앞두고 워싱턴 D.C. 국립 공원 내의 2차 대전 기념물 ‘자유의 벽’ 앞에 섰다고 하면서 “고통과 슬픔, 그리고 목숨을 바치지 않았다면 행복하게 살았을 미국 젊은이들의 가족에 대한 사랑을 발견했다”고 하며 “깊은 후회의 마음으로 묵념에 잠겼다”고 말했다.

아베 총리는 과거 일본의 제국주의 전쟁과 식민주의 침략행위에 사망자만 2,500여만 명에 달하는 막대한 피해를 입힌 한국과 아시아 주변국에 대한 사죄는 교묘히 피해나가는 수법을 고수한 반면, 일본이 미국을 상대로 벌인 태평양 전쟁과 그로 인해 희생된 40여만 명의 미국 장병들에 대해서는 깊이 반성한다고 아첨을 떠는 이중적인 태도를 보인 것이다.

연설을 마무리하면서 그는 유학시절 자주 불렀다는 미국 가수 캐롤 킹의 “넌 친구가 있어(You’ve Got A Friend)”라는 노래의 가사를 읊조리며 미국과 일본의 우정을 돈독히 하자고 제의했고 미 의회 의원들을 기립박수로 화답했다. 연설 이후 오바마 대통령은 아베 총리 내외를 백악관 만찬에 극진히 환대하였고 양국의 관계는 사상 최고조에 이른 모습을 보여주었다.

일본은 제2차 세계 대전 패전 이후 미군정에 의해 ‘보통국가’로서 정식 군대를 가지거나 전쟁을 할 수 없도록 평화헌법 제9조에 명시하게 되었지만 1954년 미국의 냉전전략에 따라 자위대 창설이 허용되었다. 이제 그로부터 60여 년이 지난 후 이전 냉전 시대 구소련과 같이 떠오르는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미국이 승인한 일본의 ‘보통국가화’ 프로젝트가 완성단계로 나아가고 있다.

국방예산 삭감과 국제무대에서 영향력 감소를 두려워하고 있는 미국은, 자신들의 역사적 과오에 대한 반성이 없는 일본을 이제는 과거의 잘못을 덮어주고 미래로 나아가자고 하면서 아시아 전쟁피해국가들에게 화해를 강요하고 있다. 여기에 미국은 ‘북한의 도발 위협에 대응해야 하는 한국 입장에서도 이로운 일’이라는 논리를 내세워 한-미-일 삼각동맹 추진과 함께 중국의 강력한 반발에도 불구하고 한국에 탄도미사일 방어시스템인 ‘사드(THAAD)’배치를 종용하고 있다.

 

아베 신조 일본 총리는 미 의회 연설에 앞서 4월 22일 자카르타에서 올해로 60주년을 맞이한 비동맹운동 국가회의인 아시아-아프리카(AA) 정상회의(일명 ‘반둥회의’)에서 기조 연설을 통해 “일본이 (2차 세계 대전에) 저지른 일에 대해 깊이 반성한다”라고 말했지만, 여기서도 식민지 지배로 인해 고통받은 아시아 국가들에 대해서는 사죄의 뜻은 전혀 밝히지 않았다.

총리 재직 당시 기습적인 신사참배로 물의를 일으키곤 했던 아베의 보수정치 선배인 고이즈미 준이치로 전 총리는 10년 전 반둥회의 50주년 회의에서 “식민지 지배와 침략으로 많은 국가들에 큰 손해와 고통을 준 것에 대해 통절한 반성과 마음으로부터의 사죄를 표한다”고 말한 바 있다. 이와 달리 아베 총리는 ‘일본은 2차 대전 이후 계속해서 평화국가로서 걸어왔다’는 것만을 강조하고 사죄에 대한 부분은 언급조차 안 해 고이즈미 전 총리에 비해서도 한참 후퇴했다고 평가되었다.

이런 일본의 뻔뻔한 자세를 비난하듯 작년 11월 베이징에서 열린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회의에서 시진핑 국가주석은 취임 후 일본 정상을 처음 만나 악수하는 자리에서 반갑게 웃으며 인사를 건네는 아베 총리와는 달리 쳐다보지도 않고 굳은 표정으로 손만 잡는 장면이 포착되어 기자단의 폭소를 자아낸 바 있다.

하지만 5개월 만에 다시 만난 반둥회의에서 시진핑 국가주석은 아베 총리를 반갑게 맞이하며 가볍게 웃는 모습까지 보여주었다. 그는 아베 총리의 이중적인 논지의 연설에 대해서도 이전처럼 예민하게 반응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중·일 관계가 어느 정도 개선되었다”고 말하기까지 했다.

일본은 주변국 외교에 있어 ‘정냉경열(政冷經熱, 정치와 경제를 분리해 다른 나라와 정치적인 관계가 냉각되더라도 경제문제는 활발하게 가져간다)’는 자세를 고수하고 있다. 중국도 역시 최근 1,000억 달러 규모로 아시아 전체와 유럽까지 아우르며 추진하고 있는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에 일본을 끌어들이기 위해 한층 변화된 ‘정온경열(政溫經熱)’의 자세를 보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중국정부의 대일외교 태도 변화는 중국외교관들이 작년 11월, 양제츠 중국 외교담당 국무위원과 야치 쇼타로 일본 안보국장이 영토와 역사 인식에 합의했을 때부터 이미 시작되었다. 중국도 자존심을 내세울 때는 강하게 나오다가 때로는 실리를 위해 때로는 풀어주는 모습을 보면서 외교에서는 무조건 원리원칙만 고수하는 것이 능사는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반둥회의에 중·일 정상이 만나 환담하는 동안 박근혜 대통령은 자원외교를 위해 남미순방을 다녀왔다. 소기의 성과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국내 언론들과 외교 전문가들은 반둥회의에 중·일 정상이 만나리라는 예상을 하지 못하고 청와대가 남미 순방일정을 잡은 것에 대해 격동의 외교현장에서 허를 찔린 것 아니냐고 질책을 쏟아냈다. 그러자 청와대는 “대중, 대일 외교수위는 우리가 스스로 판단하는 것”, “반둥회의와 한-중-일 3국의 외교를 연결짓는 것은 외교의 기본을 모르는 것”이라며 오히려 황당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하지만 “외교안보정책에는 실수가 용납되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취임한지 2년이 지났건만 박근혜 정부는 일본과 단 한번도 정상회담을 가지지 못했다. 한·일 관계가 경색되었다고 해서 무조건 만나지 않는 게 능사가 아니다. 물론 위안부 문제, 독도분쟁 문제, 일본 교과서의 역사왜곡 문제는 우리에게 한 치도 물러날 수 없는 중요한 사안들이지만 차라리 만날 땐 만나서 따질 것은 따지고 챙길 것은 챙기는 유연한 처신이 필요하다. 원리원칙만 강조하다가 자칫 우리만 국제정치에서 왕따로 고립되는 결과를 자초할 수 있다. 세계에서 한국은 지정학적으로 가장 불리한 위치에 있는 나라인 만큼 더욱더 우리의 실리에 바탕한 빈틈 없는 외교정책 수립이 요구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