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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경제를 일군 ‘경영의 신’들대기업 창업주들은 어떻게 성공할 수 있었는가
정재영 기자 | 승인 2015.06.05 17:49|(183호)
한 나라의 경제가 성장하기 위해서는 경제정책, 정부와 기업 간의 원활한 소통 등이 필요하다. 그러나 그 이상으로 중요한 것이 기업인들의 기업가정신일 것이다. <정경뉴스>는 6월호 ‘대한민국 경제를 일군 5대 기업 창업주들의 성공신화 특집’을 통해 그들이 지닌 기업가정신과 성공 요인에 대하여 짚어보았다.
 
삼성의 호암 이병철, 현대의 아산 정주영, SK의 최종현, LG의 연암 구인회, 롯데의 신격호. 이들 다섯 창업주들은 ‘경영의 신’이라는 찬사를 받아야 마땅한 이들이다. 그들은 궁핍과 어려움을 불굴의 의지로 헤쳐 나와, 대한민국 경제의 기둥으로 자리 잡은 기업들을 세웠다. 태어날 때부터 부유했던 이도, 아닌 이도 있지만, 모두 시대의 변혁기에 찾아온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들이 걸어온 길은 그대로 대한민국 산업과 그 구조 전환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다섯 ‘경영의 신’들은 항상 새로운 일자리, 부, 기회를 창조해 낸 시대의 영웅들이었다. ‘창조경제’가 중요하다고 대통령까지 나서서 강조하는 지금, 이 시대에 창업주들의 경영신화를 다시 한번 되돌아보며 그들의 도전정신과 창조정신, 불굴의 의지 등을 분석했다.
 
   
▲ 호암 이병철 회장 (사진제공 = 삼성 홈페이지)
예견과 통찰로 혁신을 가져온 삼성그룹 호암 이병철 회장
 
“가장 위험한 것은, 처음부터 실패 여지가 있다는 불안을 갖고 시작하는 것이다”
 
2014년 세계 7위의 브랜드 가치를 지닌 것으로 평가되며, 그룹 전체가 아닌 하나의 소속 회사가 세계 13위의 기업이 된, 시가총액 세계 3위인 한국의 자랑스러운 기업이 있다. 누구나 그 이름을 아는 삼성그룹이다.
“기업은 항상 새 시대의 새로운 요구에 의한 변신을 통해 부단히 성장·발전해야 한다. 기업의 인재들 또한 끊임없는 교육과 연수를 거쳐 변신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왕성한 기업가정신과 기술개발이 없어서는 안 된다. 시대를 앞지르는 적확한 통찰력과 왕성한 창조적 의욕을 꾸준히 갖고 있는 경영만이 기업을 성장·확대시키고 기업의 생명을 오래 지속시킬 수 있다.”
호암 이병철 회장은 삼성그룹을 성장시킬 수 있었던 자신의 기업론에 대해 자서전 <호암자전>을 통해 이처럼 언급했다.
 
   
▲ 삼성 창업주인 고 호암 이병철 선대회장은 1938년 3월 22일 대구에서 자본금 3만 원으로 삼성상회를 창업했다. 오늘날 세계에서 손꼽히는 삼성그룹의 시작은 이처럼 작은 건물이었다.
호암의 비전은 철저한 분석과 통찰에서 나왔다
이병철 회장의 기업론은 몇 번의 실패 경험을 통해 길러졌다. 일제 강점기, 정미소를 운영하던 이병철 회장은 처음에는 시세의 변화를 읽지 못해 실패했다. 그 실패를 극복한 후에는 지나친 투자를 통해 다시 한번 실패했다. 그러나 실패에 머물러 있지는 않았다. 두 번의 경험에서 얻은 교훈을 다섯 가지로 기록해, 평생의 교훈으로 삼았다.
 
첫째, 사업은 시대의 움직임을 정확히 통찰해야만 한다.
둘째, 무모한 과욕을 버리고, 자기 능력과 한계를 냉철히 판단해야 한다.
셋째, 우연한 행운을 바라는 투기는 절대로 피해야 한다.
넷째, 항상 대비책은 제2, 제3까지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
다섯째, 대세가 기울어, 이미 실패라는 판단이 섰다면 미련을 버리고 차선을 택해야 한다.
 
이후의 사업에서도 항상 이 회장은 이 교훈을 토대로 행동했다. 6·25 전쟁 당시 무역업으로 큰돈을 벌면서도 스스로 물건을 만들지 않으면 삼성의 호황은 계속되지 못할 것이라는 점을 읽고 제조업에 도전해, 국내 최초로 설탕을 제조했다. 지금은 비록 CJ그룹으로 갈라졌지만, 시장에서 부동의 위치를 굳히고 있는 백설표 설탕, 즉 제일제당이 이때 만들어졌다. 이 당시 삼성은 설탕을 통해 “아침에 한 트럭 설탕을 싣고 나가면, 저녁에는 돈을 한 트럭 싣고 돌아온다”라고 불릴 정도의 성공을 거두었다. 이후에도 호암은 정부의 시책이나 시장 상황의 변동에 따라 사업을 늘리거나, 때로 철수하기도 했다. 그러나 항상, 철저한 분석과 통찰이 삼성의 성공 뒤에는 자리 잡고 있었다.
 
   
▲ 호암 이병철의 사업이념은 ‘사업보국’, 즉 사업으로 나라를 돕자는 것이었다. 그런 이념대로 삼성은 항상 나라에 필요한 산업을 먼저 만들어나갔다. 사진은 1984년 삼성중공업 건설현장을 방문한 호암 이병철 회장. (사진제공 = 삼성 홈페이지)
미래 산업에 대한 예견
삼성의 성공은 분석과 통찰만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지금의 삼성을 만든 원동력인 삼성전자는 호암의 미래 예견을 통해 이루어졌다. 1983년, 이병철 회장은 당시 미국과 일본이 양분하던 반도체 시장에 뛰어들었다. 반도체 공장은 한 개 라인을 건설하는 데만도 당시 비용으로 1조 원이 드는 대사업이었다. 자칫 잘못하면, 평생을 노력해서 키워온 삼성이 무너질 수도 있는 모험이기도 했다. 반도체 산업이 미래 산업이며 가장 부가가치가 높은 산업일 것이라는 예견이 73세의 나이의 호암에게 또 다른 도전을 시도하게 했다.
“철강 1톤을 생산하면 부가가치는 20원에 불과하다. 하지만 1톤 무게의 자동차를 생산하면 그 부가가치는 500만 원으로 늘어난다. 그리고 1톤 분량의 컴퓨터를 만들게 되면 3억 원의 부가가치가 발생하게 되며, 반도체를 1톤 분량 생산하면 무려 13억 원의 부가가치가 발생하게 된다.” 1982년부터 1년간, 일본이 중화학공업에서 반도체를 비롯한 신소재 쪽으로 국가의 산업구조 자체를 바꿔나가고 있다는 것을 지켜본 이병철 회장은 미국이 반도체 기술을 먼저 개발했음에도 일본과 시장을 분할하는 정도라면, 후발주자인 삼성이 대량생산으로 단가를 낮춘다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한 뒤 거침없이 투자했다.
처음 전 세계는 이병철을 미친 사람이라 비웃던 것이 1983년 말, 당시 최첨단 기술인 64KD 램을 삼성이 양산하는 데 성공하면서 전 세계는 경악의 탄성을 낼 수밖에 없었다. 지금에 와서는 세계에서 가장 최첨단의 기술을 보유한, 이제는 일본과 미국이 그 기술력을 따라오려면 5년이 필요하다는 삼성전자의 전설이 시작된 것이다.
 
‘사업보국’의 신념으로…
이병철 회장은 “기업은 영원한가? 영원하지 않다. 기업이 없으면 국가도 없지만, 국가가 없으면 기업도 없다. 개인의 이익보다 공익을 먼저 생각하고 정직하게 사업해야 한다”라고 자신의 자서전을 통해 일갈했다. 변화에의 도전을 게을리 하면 기업은 쇠퇴하며, 일단 쇠퇴하면 재건하는 것은 지극히 어려운 일이라고 언급하기도 했다.
호암 이병철 회장의 사업은 항상 특징이 있었다. 항상 그 시대에 맞게 대한민국에 가장 필요한 사업에 도전했다는 것이다. 산업조차 제대로 일궈지지 않은 초창기의 대한민국에 무역을 통한 물자 조달로 활력을 불어넣었다.
전쟁 후의 폐허만 남아있을 때는 수입을 대체할 설탕, 모직, 국수를 생산하는 소비재산업을 설립해 한국 경제를 원조 경제에서 자립 경제로 거듭나게 했다. 기간산업의 기반조성을 위해 중화학공업을 건설했다. 마지막으로 그 쌓아올린 기반을 토대로 신소재, IT 기술 등으로 산업구조가 변경될 때에도 가장 먼저 뛰어들어 ‘대한민국 호’를 제3의 물결에 무사히 실었다. 모두 ‘사업보국(事業報國)’, 즉 사업을 통해 나라에 은혜를 갚겠다는 그의 신념이 이뤄낸 ‘신화’다.
 
 
 
   
▲ 아산 정주영 회장(사진제공 = 아산 정주영 기념관)
‘왕회장’이라 불린 기업가, 현대그룹 아산 정주영 회장
 
“어제와 같은 오늘, 오늘과 같은 내일을 사는 것은 사는 것이 아니라 죽은 것이다”
 
만약 살아있다면 올해로 100세를 맞이하는 한국 경제의 거인, ‘왕회장’ 정주영 회장. 모든 한국의 창업주들이 맨 땅에서 일어난 것과 같지만, 그중에서도 정주영 회장의 일대기는 특별하다. 얼마 전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영화 <국제시장>에도 극중 카메오로 정주영 회장의 이야기가 등장할 정도로 우리 국민들에게 인기가 많은 기업가이기도 하다. 정주영 회장은 남들이 시도하지 않았던 방법을 통해 성공을 거두며 대한민국 경제사에 한 획을 그었다. LG그룹의 구자경 명예회장은 이런 정주영 회장을 두고 ‘스스로 땅을 찾아 말뚝을 박은 사람’이라 부르기도 했다. 정주영 회장과 관련해, 대표적인 일화로는 ‘울산 조선소 건립’과 ‘사우디아라비아 주베일 산업항 건설’이 있다.
 
   
▲ 1971년 영국 버클레이즈 은행과 차관 도입 계약을 체결하는 아산 정주영 회장. 너른 백사장 사진과 유조선 설계도, 그리고 거북선이 그려진 500원 지폐만이 있었지만, 아산 정주영 회장은 뚝심과 용기로 결국 세계 최대의 조선소를 만들어냈다.(사진제공 = 아산 정주영 기념관)
스스로 땅을 찾아 말뚝을 박은 사람, 울산 현대조선소 건립
유조선 설계도와 울산 미포만의 너른 백사장 사진 한 장씩만을 들고 1971년 런던으로 향한 정주영 회장, 당연하지만 들어보지도 못한 국가에서 찾아온 사업가에게 흔쾌히 차관을 제공할 은행은 없었다. 그러나 정주영 회장은 기지를 발휘했다. 바클레이 은행의 롬바텀 회장에게 당시 대한민국에서 쓰이던 5백원 지폐를 보여주며 “우리 대한민국은 영국보다 300년 일찍 철갑선을 만든 나라다”라는 자신감을 보여주며 차관을 얻어냈다.
이어서 세계 해운업의 거물인 그리스 선 엔터프라이즈(Sun Enterprise)사의 조지 리바노스 회장으로부터 조선소가 건립되기도 전에 26만 톤 유조선 2척을 수주하는 거짓말 같은 성과까지 이끌어냈다. 조선소의 건립 기간도 2년 3개월에 불과했으며, 조선소의 완공과 유조선의 진수가 동시에 이루어졌다는 세계 역사에서 유래 없는 업적까지 이루었다. 리바노스 회장은 유조선 2척을 인도받는 자리에서 “지금까지 내가 본 배 중 가장 좋다. 나는 좋은 파트너를 얻었다”라고 극찬하면서 그 자리에서 다시 9척을 주문했다. 세계 최대의 조선소 중 하나인 울산 현대조선소는 이렇게 세워졌다.
 
   
▲ 당시 세계 최대 규모의 사업이자 대한민국 국가예산의 30%에 달하는 공사였던 주베일 산업항 공사가 현대그룹을 세계적 기업으로 도약하게 해 주었다. 사진은 주베일 산업항의 모습.(사진제공 = 아산 정주영 기념관)
“이봐, 해보기나 했어?”, 사우디아라비아 주베일 산업항 건설
이 사업은 길이 8km, 폭 2km의 매립지를 수심 10m의 바다에 만들어 항구와 기반시설을 세우는 프로젝트로, 1976년 대한민국 국가예산의 30%에 달하는 9억 3,000만 달러의 공사이며 세계에서도 최대 규모의 항만 공사였다. 세계에서 내로라하는 건설 회사들이 모두 달려든 이 프로젝트를 그동안 해외 건설에서 쌓아온 신용과 신뢰를 통해 정주영 회장과 현대건설이 획득했다. 정주영 회장은 공사에 들어가는 비용을 최대한 절약하기 위해 모든 철제 구조물을 한국에서 생산해, 주베일로 운송하는 방법을 사용했다. 뗏목이나 마찬가지인 바지선에 수십만 톤의 구조물을 실어 지구 반대편까지 실어 나르는 것은 단 한번의 전복만으로도 돌이킬 수 없는 손실을 입게 된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주베일 프로젝트에 참여하는 것에도, 구조물을 한국으로부터 실어 나르는 것에도 반대하는 현대의 임원들에게 정주영 회장은 한마디만을 말했다. “이봐, 해보기나 했어? 모든 일은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만이 해낼 수 있어.”
 
뚝심과 긍정으로 일어서다
정주영 회장은 항상 다른 사람들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한 것에 도전해, 몇 번이고 성공했다. 그의 창의력의 절정은 현대조선소 건립이나 주베일 산업항 건설보다도, 1952년 부산 광안리 유엔군 묘지에 만들어 낸 ‘한 겨울의 푸른 잔디’일 것이다. 당시 전쟁 중인 한반도의 유엔군을 위로하기 위해 미국의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방한했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유엔군 묘지를 참배하고자 했으나 당시 막 조성된 유엔군 묘지는 붉은 흙이 그대로 드러나 있는 상태였다. 한 겨울이었기에 푸른 잔디를 구할 수 있는 방법도 없었다. 아무도 푸른 잔디를 겨울에는 찾아낼 수 없다고 포기할 때, 정주영 회장은 “푸른 색 풀이면 되지 않는가!”라고 말하며 부산 근교의 막 심은 보리 새싹들을 캐어 유엔군 묘지를 장식했다. 이를 통해 당시 부산에 주둔해 있던 미 8군 공병대의 신뢰를 얻었고, 현대는 성장할 수 있었다. 상식과 고정관념보다는 ‘자신이라면 성공할 수 있다’는 긍정적 마인드가 정주영 회장을 성공가도로 올려놓은 셈이다.
 
솔선수범하며 휘하를 키워낸 총수
아산 정주영 회장은 “회사의 최고 경영자가 솔선수범하지 않으면 직원에게 명령을 내려도 일이 제대로 되지 않는다”라는 생각을 가지고, 스스로 현장을 항상 챙겼다. 현대자동차를 처음 시작할 때부터, 아산재단을 설립해 대북 지원과 가난한 이웃에 대한 봉사를 할 때에도 스스로 현장이 돌아가는 것을 꿰뚫는 것을 원칙으로 했다.
그는 태만하거나 현상 유지만을 하려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매서운 질책을 했다. “기업은 행동하면서 이루는 거지, 아무리 똑똑한 사람들이 모여도 머리로 생각만 하면 기업은 클 수 없다. 어떤 사람을 만나야 한다는 생각이 들 때 당장 뛰어나가는 사람이 있고, 미적거리다 한 시간 뒤로 행동을 미루는 사람도 있다. 어쩌면 그 한 시간에는 큰 차이가 없을지 모른다. 하지만 한 시간 뒤로 미루는 사고방식의 차이는 인생의 승패를 가름한다.” 함께 밥을 먹고, 함께 흙을 묻히는 회장의 앞에서 그 누가 약한 소리를 할 수 있었을까. 정주영 회장은 가능성이 엿보이는 직원들을 ‘무슨 일이든 누구보다 철저하고 완벽하게 수행할 능력과 책임감을 가진 만능 일꾼’으로 육성해, 현대의 등뼈를 만들어냈다.
작고하기 전까지 그는 끊임없이 현장을 돌아다녔다. 스스로 소떼를 이끌고 방북을 했으며, 제3국 건설시장에의 진출, 서해안 공단 조성 사업 등을 끊임없이 구상했다. “아직 은퇴하기에는 너무 젊다. 나는 120세까지 살면서 우리나라가 경제적으로 한 단계 도약을 할 수 있게, 우리나라가 통일을 할 수 있는 토대를 만드는 큰일을 할 것이다”는 것이 ‘왕회장’의 입버릇이었다. 늘 스스로를 성공한 기업가가 아닌 부유한 노동자로 생각한 아산 정주영. 가난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나 83개의 기업을 일으켜 세운, 뒤돌아 볼 새 없이 뛰어갔던 그는 2006년 아시아의 영웅으로 타임지에 등재된, 대한민국의 영웅이다.
 
 
 
   
▲ SK 최종현 회장. 형인 최종건 회장은 선경을 세웠고, 그는 SK 그룹을 세웠다.(사진제공 = SK그룹 역사관)
21세기 일등 국가를 지향한 애국자, SK그룹 최종현 회장
 
“도전하는 자가 미래를 지배한다”
 
온 나라가 IMF 파동으로 술렁인 1998년, 최종현 회장은 온몸에 번져가는 암과 싸우면서도 경제학, 정치학, 사회학을 막론하고 각 분야의 전문가들을 찾아다녔다. 그들과 대한민국이 21세기에 나아갈 길을 토론하고, 그 결과를 스스로 기록했다. 최 회장은 기록을 통해 20세기 대한민국이 겪은 시련의 길을 참고로 삼고, 앞으로 대한민국이 나아갈 21세기의 밝은 미래를 제시했다. 정부의 불필요한 규제가 없고, 노사가 서로 기업의 미래를 진지하게 토의하는 나라. 사회복지제도가 올바로 구축되고, 아이들이 자유로운 교육을 받는 나라. 그런 대한민국을 그리며 그는 1998년 8월 26일, 69세의 나이로 눈을 감을 때까지 글을 써 내려갔다. 그의 유고는 1999년 <21세기 일등 국가가 되는 길>이라는 이름으로 출간되었고 이후 수많은 후속 연구를 탄생하게 했다.
 
   
▲ SK 그룹은 최종현 회장 시기에 석유화학의 수직계열화를 구축했다. 이후 석유사업은 SK 그룹의 확실한 ‘캐시카우’가 되었다. 사진은 SK 에너지 울산공장에서 해외로 수출하기 위한 석유제품을 유조선에 선적하고 있는 모습.
중단 없는 전진, 제2의 창업
가형(家兄)인 담연 최종건 회장이 1973년 향년 48세로 세상을 떠난 뒤, 44세의 나이로 최종현 회장은 선경을 맡게 되었다. 당시 선경은 섬유산업 부문에서는 독보적이었으나, ‘다음 세대’를 위한 새로운 사업을 필요로 하고 있었다. 최종현 회장은 최종건 회장이 세상을 뜨기 전까지 구상하던 석유 사업에의 진출과 ‘섬유에서 석유까지’의 수직계열화(기업이 생산하는 제품의 생산 및 판매 과정 전체에 관련된 기업들을 모두 계열사로 삼는 것을 의미한다.)라는 원대한 목표를 세우고 이를 위한 장기적 포석을 펼쳐나갔다.
경제계는 물론 선경 내부에서도 무모한 결정이라는 의견이 많았다. 하지만 최종현 회장은 ‘미래는 도전하는 사람의 것이다’라고 선언하면서, 선경유화를 중심으로 원유 공급 실적을 쌓는 것부터 시작했다. 7년간 꾸준히 실적을 쌓은 결과, 선경은 1980년 12월 정부의 대한석유공사 민영화 조치 당시 원유 공급능력을 인정받아 대한석유공사(유공)을 인수하게 되었다. 이후 석유판매회사 ‘흥국상사’를 인수하고, 석유운송회사 ‘유공해운’을 창립했으며 10여 년에 걸쳐 석유화학단지를 건설해 나갔다. 석유사업에 처음 뛰어들 때부터 계산하면 20여 년 만인 90년대 초, 결국 최종현 회장은 ‘석유에서 섬유까지’라는 당초 목표를 뛰어넘는 석유에서 플라스틱 전반까지를 완전 수직 계열화시키는 데 성공했다. 선경이라는 회사의 체질을 근본적으로 바꾼, ‘제2의 창업’에 성공한 셈이다.
그러나 최종현 회장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수직계열화가 완성되기도 전인 1984년부터 21세기 SK에게 필요한 새로운 사업은 무엇인가에 대해 연구했다. 당시 가장 기술적으로 발달한 미국에 사람을 파견해 조사 및 연구를 수행하게 했고, 그 결과 21세기에는 정보통신기술이 국가경제에 가장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게 될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최종현 회장은 미국에서 관련 사업을 전개하며 첨단기술과 인력 확보에 전력을 다했다. 결국 1994년 7월 한국이동통신을 인수했고, 이는 오늘날 대한민국 3대 이동통신 회사 중 하나로 꼽히는 SK 텔레콤의 기반이 되었다.
 
   
▲ 최종현 회장은 SUPEX 정신, 즉 무엇이든지 SUPer EXcellent하게 해낼 수 있기를 SK 전 사원들에게 기대했다. 그 정신은 지금도 SK 그룹의 최고경영 협의기구의 이름인 ‘SUPEX 추구협의회’에 계승되고 있다. (사진제공 = SK 홈페이지)
세계 제일주의와 인재 육성
현재도 SK그룹의 핵심 조직 중 하나로, ‘수펙스(SUPEX)추구협의회’라는 조직이 있다. 이 ‘수펙스(SUPEX)’란 최종현 회장이 만들어낸 조어이며, 경영목표이다. 최 회장은 SK가 판매하는 상품과 기업 조직, 구성하는 인력에 있어서는 세계에서 최고로 우수한(Super Excellent) 기업으로 거듭나기를 바랐다. 즉 상품과 사람의 질에 있어, ‘세계 제일주의’를 표방한 것이다.
최종현 회장은 우선 인재를 길렀다. 1970년부터 당시로써는 거액인 5,500여만 원을 들여 장학재단인 ‘한국고등교육재단’을 설립하고, 순수학문 분야의 학생들에게 막대한 지원을 했다. SK만을 위한 인재육성이 아닌 ‘나라에 도움이 되는 사람’을 기르기 위한 장기적인 투자로, 국가 전체의 인재 역량이 성장해야만 SK의 인재 역량도 성장할 수 있다고 판단한 최종현 회장의 결단이었다. 이렇게 육성한 인재가 SK의 책임 있는 직무를 맡게 되면, 그를 전적으로 신뢰하고 능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조직 구조 역시 최종현 회장 시기에 만들어졌다.
 
사회적 책임을 지는 기업이 돼야 한다
최종현 회장은 기업의 소유자는 기업인이지만, 나라를 통해 기업의 이익은 국민들에게 고루 분배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SK가 성장하는 것은 SK의 구성원들을 풍요롭게 할 뿐만 아니라,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의 국익에 보탬이 되고 경제발전에 기여하는 지름길이라고 보았다.
“기업이익은 국가와 사회 건설에 기여해야 하며, 기업은 사회적 책임을 통해서 사업 보국주의에 전념해야 한다”고 언급한 최종현 회장은 시대를 앞서가는 경영 비전과 통찰력으로, 한국 경제의 현재와 미래를 내다볼 줄 알았던 진정한 경영인이자 재계의 리더였다.
 
 
 
   
▲ 연암 구인회 회장의 ‘품질경영’ 어록은 3개 국어로 번역되어 LG전자 전 세계 모든 해외법인에 걸려 있다.(사진제공 = LG 역사관)
사람을 믿은 기업인, LG그룹 연암 구인회 회장
 
“무수한 식구들은 그야말로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락희의 산 자산이다”
 
2005년 3월, GS그룹의 출범식이 열렸다. 이 행사에서 구본무 LG그룹 회장은 만감을 담아 축사를 읽었다. “지난 반세기 동안, LG와 GS는 한 가족으로 지내며 한국을 대표하는 기업으로 우뚝 섰다. 지금까지 쌓아온 LG와의 긴밀한 유대관계를 더욱 발전시켜 일등기업을 향한 좋은 동반자가 되길 바란다.” 반세기 동안 이어진 구 씨 가문과 허 씨 가문의 동업관계는 청산되었지만, 그들의 근본정신인 인화(人和)는 흔들리지 않았다. 창업주 연암 구인회 회장으로부터 이어지는 화합과 신뢰가 유종의 미를 거둔 순간이었다.
 
근대적 산업의 기원을 쌓다
해방 이후 구인회 회장은 부산에서 대한민국 제1호 무역업체인 조선흥업사를 설립해 운영했다. 그리고 1947년 락희화학(현재 LG화학)이라는 이름으로 판매 대리에서 제품 생산의 단계로 접어들었다. 50년대에는 국내 최초로 플라스틱 공업에 뛰어들었으며, 1960년대에는 유지제품과 합성세제를 개발해 화학 산업을 성숙시켰다. 당시 락희의 제품을 사용해 본 소비자들은 너나할 것 없이 감탄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플라스틱 빗을 사용하며 한국에서 이런 제품이 나온 것에 대해 감격했다고 하며, 락희화학에서 개발한 럭키치약은 불과 3년 만에 미국산 콜게이트 치약에 잠식되었던 시장을 되찾아오기도 했다.
또한 구인회 회장은 금성사를 설립해 국내 최초로 라디오(A-501)를 생산했고, ‘백색 가전의 LG’라는 명성을 키울 기반을 쌓아올렸다. 민간 정유회사를 최초로 설립해 에너지산업 발전 및 국가 에너지의 안정적 확보에 기여한 것 또한 구인회 회장의 공이다. 국가 경제를 위해 반드시 필요한 근대적 산업인 플라스틱 공업, 전자 공업, 석유화학을 포함한 중화학 공업까지 모두 ‘창업의 시대’에 설립했으며, 이는 지금까지 범 LG그룹(2005년 분사한 GS그룹을 포함)의 기반이 되고 있다.
 
   
▲ LG전자의 역사는 한국 전자산업의 역사이기도 하다. 사진은 최초의 라디오가 만들어진 LG전자의 첫 번째 공장.(사진제공 = LG 역사관)
구름을 잡은 사나이
1970년대 초, 아직 LG가 전자산업에 진출하기 전의 일이다. 당시 플라스틱산업이 주력이었던 럭키는 반드시 석유산업에 진출해야 했다. 하지만 국가 기간산업인 석유산업에 기업이 진출하도록 허가를 내 줄 정부 인사는 없었다. 구인회 회장이 석유산업에 진출하고자 하는 모습을 보고 사람들은 “뜬구름 잡는 소리”라고 비웃었고, 정부 관리들도 턱없는 소리라고 황당해 했다. 하지만 치열한 각축전 끝에 럭키화학은 결국 최초의 민간 중화학공업 시대를 여는 ‘호남정유’를 설립하게 된다. 이후 사람들은, 구인회 회장을 가리켜 “구름을 잡은 사나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이를 통해 럭키화학은 막대한 이득을 얻었고 럭키는 다음 사업들을 할 기초 체력을 갖게 되었다. 또한 구인회 회장은 ‘럭키’라는 한 기업만 이득을 가질 것이 아니라 국가 전체가 이익을 가져야 한다는 신념으로 가장 먼저 기업공개를 해 일반인들이 럭키의 주식을 살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었다.
 
파트너십으로 최초를 일구어 내다
정주영 회장 사망 이후, 현대그룹에서 벌어진 경영권 승계 싸움인 이른바 ‘왕자의 난’만 보아도 알 수 있듯이 형제지간에도 이루기 어려운 것이 동업이다. 비록 사돈이라고 해도 서로 다른 구 씨와 허 씨 가문이 60년 가까운 시간 동안 동업을 이어나갈 수 있었던 것은 구인회 회장의 인화(人和)정신에 기원한다. 서로의 장점을 이끌어 나갈 수 있도록 적재적소에, 그러면서도 동등한 권한과 이익을 볼 수 있는 자리에 고루 배치한 연암 구인회 회장의 용인의 방법은 현재도 LG와 GS가 서로의 영역을 침입하지 않는 ‘우애 경영’을 할 수 있는 기반을 만들었다.
 
 
 
   
▲ 롯데그룹 신격호 총괄회장.
불굴의 거인, 롯데그룹 창업주 신격호 회장
 
“겉으로 드러나는 화려함을 배제하고, 내실을 지향한다”
 
그는 이를 악물었다. 두 번이나 공장이 폭격 속에서 잿더미가 됐지만, 자신을 믿고 두 번이나 돈을 빌려준 하게미쓰 노인에게 은혜를 갚겠다는 생각뿐이었다. 하게미쓰 노인조차 “이것이 운명인 모양이다”라고 체념했지만, 그는 체념할 수 없었다. 기계 연마용 기름을 만들던 경험을 살려, 비누와 화장품을 만들기 시작했다.
물자가 부족한 시대였기에, 만든 물품은 순식간에 날개 돋친 듯이 팔리기 시작했다. 결국 그는 1년 반 만에 은혜를 갚는 데 성공하고 재기했다. 한국 경제의 신화를 일군 거성(巨星)들이 대부분 사라진 2015년 현재까지도 94세의 나이로 왕성한 활동을 보이고 있는 신격호 롯데그룹 총괄회장의 시작이다.
 
화려함을 멀리하고 실속을 추구한다
롯데는 지극히 합리적이고 현실주의적인 경영 판단을 내리는 것으로 유명하다. 한일 양국에 뿌리를 내린 기업이기에 언론에 많이 나선다면 더 큰 기업으로 자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언론에 자원을 투자해서 얻는 화려함(華)보다는 견실한 본업(實)을 얻는 것을 중요시 해 왔다. 신격호 총괄회장의 모교인 와세다 대학의 교훈이기도 한 ‘거화취실(去華就實)’이 롯데의 이념인 셈이다. ‘우리의 일은 우리가 추진한다’는 정신으로 일을 시작할 때에도 다른 기업이나 투자가의 자본을 빌리지 않고 스스로 역량을 키운 뒤 충분한 역량이 있다고 판단될 때 일을 시작하는 것이 신격호 회장의 경영 스타일이다.
 
   
▲ 대한민국 대기업 창업주들 중 유일하게 생존해 있는 이가 신격호 롯데 총괄회장이다. 사진은 5월 22일 서울 송파구 롯데월드타워 공사현장을 방문한 신격호 회장.
늘 정도만을 걷다
롯데는 야구와 롯데월드를 제외하면 대중의 관심을 크게 받지 못하는 회사다. 롯데에서 나오는 과자의 이름은 기억해도, 롯데가 어떤 회사인지에 대해서는 모르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정치적이나 경제적인 스캔들에 휘말리지 않아 언론이 롯데에 대해 파헤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1998년 부도에 빠진 미도파를 인수할 당시에도, 신격호 회장은 시장 예상의 2배에 가까운 5천 400억 원을 지불했다. 법정관리 회사를 고려했다면 그보다 훨씬 싸게 구입할 수 있었겠지만, 미도파라는 회사에 대한 가치를 정당하게 매겼기에 가능한 가격이었다. 눈앞의 이익을 위해 다른 사람의 어려움을 기회로 삼지 않은 것이다.
또한 협력업체들을 가족으로 대우하고 돕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이른바 ‘갑의 횡포’가 심한 시대에, 롯데는 협력회사 직원에게까지 롯데의 직원카드와 복지혜택을 제공한다. 협력업체가 살 때, 롯데도 살 수 있다는 당연한 정도를 걷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생을 바탕으로 롯데는 성공적인 동반 관계를 구축해 왔다.
 
사랑과 생활과 자유
신격호 회장이 내세운 롯데의 모토는 3L로, Love, Life, Liberty이다. 롯데를 이용하는 고객들의 생활에 자유를 불어넣어 주는 ‘인간에의 사랑’이 롯데의 근본이념이다. “소외받은 계층을 비롯해 모든 사회 구성원이 서로를 사랑하고 인간으로서의 삶을 회복하고 자유를 얻어야 한다. 롯데의 사람이라면 스스로를 사회의 일원으로써 사회발전에 기여해야 한다는 의무를 인식하고, 현재의 이해관계자만이 아닌 미래의 고객과 사회의 이웃까지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 신격호 회장의 이념이다.
도전하는 열정에는 국경이 없다. ‘현해탄의 경영자’ 신격호 회장은 94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왕성한 활동을 보여주고 있다. 전 세계에 롯데의 이름을 드높이고, 자신의 조국인 대한민국의 위상을 드높여 기업보국을 실현하고자 하는 것이 그의 꿈이다.
신격호 회장은 “너는 조금의 어려움이 있다고 주저앉지 않느냐? 나는 아무리 어려워도 고통을 회피하지 않고, 허리를 곧추세우고 바른 길만을 걸었다. 너는 도전할 용기가 있느냐?”라고 지금의 젊은이들에게 묻는다. 모든 창업주들이 창업정신을 통해 이 땅의 젊은이들에게 가르치고 있듯이…

정재영 기자  mjknews@mjk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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