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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무공 이순신, 민족의 사표(師表)470년 동안 변하지 않는 불멸의 가치… 올곧은 지도자의 길
정재영 기자 | 승인 2015.04.02 19:08|(181호)

   
▲ 충무공 이순신 영정
15981119일 오전 8, 노량 앞바다. 나라와 백성을 위해 평생을 바친 장군이 적의 흉탄에 쓰러진다. 장군은 울면서 가까이 다가오려는 이들을 만류하며 전투가 바야흐로 급박하니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고 엄명한다. 몇 시간 후 적을 거의 전멸시키는 대승리를 거두고 환호성을 지르던 아군은 장군의 죽음을 알게 된다. 환호성은 그 자리에서 대성통곡으로 바뀐다. 장수도, 병졸도, 전투의 결과를 기다리던 백성들도 모두 같이 목 놓아 운다.

누구나 알고 있는 성웅,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마지막 모습이다. 당시를 기록한 백사 이항복의 문집, ‘백사집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도독(당시 충무공과 같이 싸웠던 명나라 수군 장군인 진린을 일컫는다.)은 공이 죽었다는 말을 듣고는 세 번씩이나 배에 엎어지면서 함께 일할 만한 사람이 없어졌구나!’라고 통곡하였다. 남도 백성들은 공의 죽음을 듣고 분주히 길거리에서 통곡하였고 시장에 있던 사람들은 술을 마시지 않았다. 그 후 가족이 고향으로 공의 시신을 모실 때 남도 중의 선비들이 제문을 지어 와 제사하였고 노약자들은 길을 가로막고 통곡하여 고을 경계까지 통곡의 행렬이 끊이지 않았다.”

다른 기록에는 장군의 유해가 실린 장례행렬이 장군의 고향인 아산까지 올라가는 동안, 머무르는 모든 고을과 길마다 백성들이 너도나도 운구를 붙들고 "공이 실로 우리를 살렸는데, 이제 공이 우리를 버리고 어디로 가시오." 라고 통곡하여 운구가 옮겨지는 데에 매우 애를 먹었을 정도라는 내용도 실려 있다. 실로 한국 역사에 있어, 충무공 이순신 장군만큼 백성의 경애를 받는 지도자는 찾아보기 어렵다. 그리고 그런 장군의 모습이 만인의 귀감이 되어, 우리나라에는 항상 이순신 신드롬이라는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순신 장군은 누구인가?

절개에 죽는단 말은 예부터 있지만, 제 몸 죽고 나라 살린 것, 이 분에게서 처음 보네.”

조선 19대 국왕 숙종이 친히 쓴 <현충사 제문>의 한 구절이다. 그야말로 논란의 여지가 없는 한민족 역사상 최고의 성웅이 바로 이순신 장군이다. 장군은 32세라는 늦은 나이에 벼슬길에 올라, 서애 유성룡의 천거가 있기 전까지는 변방 경비를 맡은 장수에 불과했다. 그러나 천거 이후 2년 만에 종 6품 정읍 현감에서 정 3품 전라좌수사까지 여덟 단계를 승진하며 능력을 입증했다. 그러나 자만하지 않고 전쟁을 예측하여 실전과 완벽하게 동일한 수준의 훈련을 꾸준히 실행했고 병기와 군선, 병사의 조련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이런 이순신 장군의 평시의 노력은 왜란이 닥쳤을 때, 28번의 전투를 모두 대승하는 것으로 입증되었다.

영국은 호레이쇼 넬슨 제독과 비견할 만한 해군 제독이 없다고 자존심을 세우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러나

   
▲ 이순신 장군에 대해 서양 전사(戰史) 연구가 중 가장 먼저 찬탄한 조지 알렉산더 발라드 제독
영국 해군의 등뼈라고 불릴 정도였던 전략가 조지 알렉산더 발라드 제독은 그의 저서 바다가 일본 정치 역사에 미친 영향의 한 장을 할애해 중세 일본군의 넘어설 수 없는 벽으로써 나타난 이순신 장군에 대해 다음과 같이 찬탄했다.

영국인으로서 넬슨과 대등한 제독이 있다는 건 인정하기 어려운 일이지만, 만약 누군가가 넬슨과 비견된다면 그건 일생동안 패배를 몰랐으며 적의 앞에서 최후를 맞은 아시아 인종의 이 위대한 제독이어야 할 것이다. 그의 행적을 쫓아가면, 용맹한 수병들을 품고 한반도 해안가의 바다 밑바닥에 가라앉은 수백 척의 일본 함선으로 항적 지도를 만들 수도 있을 것이다. 어떤 지휘관도, 최소한 해전에서는, "전쟁이란 다수가 아닌 단 한사람이 주도하는 것이다"라는 나폴레옹의 말을 그만큼 철저하게 증명하지는 못한다. 그는 적보다 열세인 전력을 가지고 싸워야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단 한 번의 실수도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그의 모든 행동은 어떤 상황에서든 비판을 거부할 정도로 완벽했기 때문이다.

그의 경력을 몇 마디로 줄이면, 과거에 지침으로 삼을 만한 전훈이 아무 것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해전 지휘는 전투에서 확실한 결과를 얻기 위해 필요한 바로 그런 지휘와 같았으며, 조국의 수호자로서 장렬히 희생함으로 생을 마쳤다고 할 수 있겠다.”

발라드 제독은 다른 저서에서도 영국인의 자존심은 그 누구도 넬슨 제독과 비교하길 거부하지만 유일하게 인정할 만한 인물을 꼽자면 한반도의 이순신 공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실수가 없었으며 그야말로 모든 면에서 완벽해 흠잡을 점이 전혀 없을 정도다.” 라고 언급하여, 상대적으로 서양 인물이 동양 인물보다 우월하게 그려지는 서양 역사학계에 있어 이순신 장군에 대한 공정한 평가를 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했다.

결국 이순신 장군은, 우리 역사만의 성웅이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도 유래 없는 대 업적을 이뤄냈고, 인정받은 위대한 인물이다. 동시에 전란 속에서 사람들을 이끈 리더십과 철저한 관리 능력까지 보유했던 분이기에, 우리 민족의 거울이자 스승이며 올곧은 지도자상이라 하겠다. 고위 관직자의 청렴과 책임감이 강하게 요구되는 이 시대, 관직에 오른 이들의 하나의 이상이 바로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다.

   
▲ 2014년 8월 21일 KTV '인문학 열전'에 초대되어 '공직자의 지표, 이순신'에 대해 강의하는 김종대 전 헌법재판소 재판관
이순신 지도자 양성 과정을 연 전() 헌법재판관

지난 39일 독특한 행사가 충무아트홀에서 열렸다. 최창식 중구청장과 이종덕 충무아트홀 사장을 포함한 예술, 종교, 법조, 정치 등 각계 인사가 참석한 가운데 열린 이 행사는 충무예술아카데미를 통해 김종대 전 헌법재판관이 개설한 1기 이순신 지도자 양성 최고위 과정의 수료식이었다.

김 전 재판관은 이순신 지도자 양성 최고위 과정을 개설한 이유에 대해 세월호 참사당시 어린 학생들을 구하지 않고 자신만 살겠다고 먼저 도망친 선장과 선원들의 모습에서 충격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또한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었던 것은 선장과 선원들이 물질적 가치를 중시하는 삶을 살았기 때문이라고 말하며, “이렇듯 뒤집힌 사회적 가치를 바로잡는 약이 바로 이순신 정신이다. 이순신 지도자 양성 최고위 과정은 이순신 정신이라는 약을 제조하고 공급할 선생님을 양성하기 위해 열었다.”라고 언급했다.

김 전 재판관은 충무공 이순신을 이루는 근간, 즉 이순신 장군의 가치회로는 사랑, 정성, 정의와 자력(自力)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것이 이순신이라는 인간 안에서 합일되고 100% 발휘되었기에 명량 해전과 같은 기적을 일으킬 수 있었다고 밝혔다. 공군 법무관 시절 노산 이은상의 충무공의 생애와 사상을 읽고 이순신의 내면에 빠져들어 30여 년 간 연구한 끝에 나온 뜻 깊은 성과다.

김 전 재판관은 강의를 하면서 업적에 감탄하는 것이 아니라, 느끼고 찾아내는 공부를 하도록 유도했다고 밝혔다. 그를 위해 사랑, 정성, 정의, 자력을 주제로 태어나서부터 죽을 때 까지 수백 개의 일화들을 꿰서 정리했다고 밝혔다. 또한 향후 충무공과 관련된 도시, 즉 청소년기를 보낸 아산, 바다의 수호신으로 자리 잡았던 여수, 나라에 대한 고민으로 시름했던 한산도에 이순신 학교를 여는 것이 자신의 사회에 대한 마지막 헌신이자 책무라고 밝혔다.

나무 한 그루도 공공의 것에는 손대지 않았던 충무공

   
▲ 1700만 관객 동원수를 자랑한 영화 '명량'의 한 장면.
충무공 이순신 장군과 관련된 명언과 일화는 셀 수 없이 많다. 이 중에서 아마도 가장 유명한 것은 영화 명량을 통해 잘 알려진 지금 신에게 아직 열 두 척 전선이 있사옵니다. 전선이 비록 적으나 미천한 신이 죽지 않았으므로 적들이 감히 우리를 업신여기지 못할 것입니다.” 죽고자 하면 살 것이고, 살고자 하면 죽을 것이다!” 이다.

또한 무과시험 도중 말에서 떨어져 다리가 부러졌을 때, 그 자리에서 다리를 동여매고 다시 시험을 치른 의지가 엿보이는 일화도 있다. 그러나 이순신 신드롬이 부는 이유는, 이순신 장군이 보여주는 결단과 의지만이 아니다. 언제나 정도를 지키는 청렴한 삶을 살았고, 그 삶이 사회 지도자의 거울로 삼기 족하기 때문이다.

이순신 장군은 관직 생활을 처음 시작할 때부터 철저한 원칙을 고집했다. 장군은 1582년 발포 수군만호로 근무했다. 영관급 정도에 해당하는 위치다. 이 때 상관인 전라좌수사, 즉 당시 조선 수군의 최고위 직위, 명백한 장군이라고 볼 수 있는 위치의 성박이 잔치에 쓸 거문고를 만들기 위해 발포 영내의 오동나무를 베기 위해 심부름꾼을 보냈다. 그러자 이순신은 오동나무 하나라도 영내에 있으면 국가의 재산이니 베어갈 수 없다고 거절했다. 이에 성박이 크게 노해 병기 상태를 점검하는 군기경차관의 직책을 지내던 서익을 매수해 이순신이 군 장비를 보수하지 않았다는 누명을 씌우고 파직시켜 버린다.

당시 조선에서 파직된 벼슬아치가 다시 원래의 위치로 돌아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이순신 장군은 당연히 그 사실을 알고 있었을 것이며, ‘성박이 장군을 그렇게 만들 수 있는 위치에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장군은 언제나 오로지 원칙을 지키기 위해 소신을 가지고 불의에 대항했던 것이다.

어느 지위에서도 변함없는 초심

이 원칙을 지키는 정신은 이순신 장군이 삼도수군통제사로써 조선 수군 전체를 지휘할 때도 변하지 않았다. 이순신 장군 휘하의 조선 수군은 유독 엄격한 군율을 가진 걸로도 유명했다. 군율의 엄정함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조선 수군은 일본 수군보다 이순신 장군을 더 두려워했으며 기록에 따르면 전사자보다 군율에 의한 처형자 숫자가 더 많았다. 게다가 장군이 지휘한 28번의 전투에서 침몰선은 0, 사상자는 모두 합해 100명밖에 되지 않는다.

그러나 이순신 장군은 철저하게 원칙을 지켰기에, 두려움도 받았지만 부하들의 신뢰도 쌓아올렸다. 이순신 장군이 평소 권위를 이용해서 사익을 챙기거나, 승리를 위해 희생을 강요하거나, 부하들을 도구로 여기거나, 편의에 따라 원칙을 곡해하는 상관이었다면 장군이 명량 해전처럼 도박과도 같은 무모한 승부수를 띄웠을 때 부하들은 칠전량 전투 때 원균의 부하들이 그랬듯이 '일본군에게 죽으나 이순신에게 죽으나 마찬가지'라 생각하고 기꺼이 이순신 장군을 버리고 달아났을 것이다.

명량 해전 당시 조정에서는 이미 '수군 폐지령'을 고려하고 있었으며, 원균의 졸전으로 칠전량에서 패배했던 수군 장수들 중에는 이순신 함대에 합류하지 않고 은둔해있는 경우도 있을 정도로 부정적인 전망뿐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12척의 배로 133척의 적선이 몰려 있는 적진을 향해서 돌격하라는 명령을 받았다면, 부하들은 그대로 도주해도 그렇게 큰 죄책감을 느끼지 않을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 이런 상황에서 이순신 장군의 돌격명령이 통했다는 것은 군율에 대한 무서움보다는 이순신에 대한 신뢰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후세는 성웅과 인간 이순신을 기억한다

   
▲ 2013년 6월 18일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된 난중일기
이순신 장군은 신뢰와 의지로 2828승을 거둬 후세에 성웅으로 기억된다. 당대에는 권신들의 모함과 어리석은 왕의 결정으로 갖은 고문을 받고 사후에도 그 격에 맞는 대접을 받았다고 보기는 힘들다. 그러나 광해군 시대부터 이미 이순신 장군에 대한 대접은 영웅에 대한 대접이었으며, 정조대왕의 시대에는 이순신 장군을 기리는 국가적 행사가 생겨났다. 일제강점기 시대에도 장군을 기리는 행사는 민간에서 비밀리에나마 열렸고, 박정희 대통령이 집권한 이후에는 충무공 이순신 탄신일을 국가 기념일로 지정해 공식적으로 행사를 거행했으며 서울 광화문에 동상을 세우고 현충사를 성역화 했다. 박정희 대통령이 쿠데타로 정권을 잡았기에 부족한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해 충무공을 구국의 영웅이자 군인정신의 표상으로 삼아 기념했다는 의견도 있지만, 그보다는 그만큼 이순신 장군에 대한 우리나라 사람들의 존경과 숭배가 컸음을 말한다.

그러나 이순신 장군은 완전무결한 사람은 아니다. 2013년 새마을운동 기록물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된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에는 보통 지위 있는 사람이라면 숨기고 싶어 할 것까지 숨김없이 드러난다. 부하들과 승경도 놀이를 즐긴다던지, 술을 마시거나 병들어 아픈 것까지 모두 드러난다. 한편으론 일반인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충무공의 고뇌나 약한 모습들도 간간히 나온다. 장군이 백의종군 이후 삼도수군통제사로 복귀하여 전선 열 두 척밖에 남지 않은 몰락한 수군의 꼴을 보자 자기도 모르게 아무도 없는 구석의 잘 안 보이는 곳에 털썩 주저앉아 이제부터 뭘 어째야 하는지 한참을 고민했다는 기록도 난중일기에는 나온다.

1597419일 백의종군을 하며 어머니를 여의었을 때 기록한 어찌 하랴, 어찌 하랴, 세상에 나 같은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어서 죽느니만 못하구나!’ 라는 표현이나 159710, 아들 이면이 죽었을 때 내가 죽고 네가 사는 것이 떳떳한 이치건만 네가 죽고 내가 살았으니 어찌 이치에 어긋났단 말인가. 슬프다 내 아들아! 나를 버리고 어디로 갔느냐!’, ‘나는 내일이 막내아들의 죽음을 들은 지 나흘이 되는 날인데도 마음 놓고 울어보지도 못했다.’라는 표현은 지금 보아도 가슴을 에는 인간적 고통이 느껴진다.

끝나지 않을이순신 신드롬

   
▲ 2014년 4월 27일 충무공 이순신 탄신일을 하루 앞두고 이순신 장군 동상 근처의 KT 광화문 지사에 성웅 이순신 대형 걸개그림이 걸려 있다. 서경덕 교수가 기획하고 이상봉 디자이너가 디자인한 '대한민국 영웅 프로젝트 제2탄 성웅 이순신' 대형 걸개그림은 지난 3개월동안 국내외에서 가로 25미터, 세로 50미터의 대형 천 위에 3만여명이 난중일기 내용을 붓으로 직접 써서 이순신 장군 이미지를 형상화 한 것이다.
이순신 신드롬은 결코 일시적인 현상이 아니다. 어려운 시대에 민족의 스승이 될 위대한 인간을 찾고자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비록 시대에 따라서 그 기념의 정도는 달라지지만, 충무공 이순신 장군에 대한 추앙과 기념을 신드롬이라 한다면 그 신드롬은 결코 끊이지 않을 것이다. 영화 명량은 해전의 박진감만이 아닌 이순신 장군의 인간적 면모까지 숨기지 않고 모두 그려냈기에 1700만 명이라는 단군 이래 최대의 관객동원수를 자랑할 수 있었으며, 최근 방영되는 사극 징비록도 이순신 장군과 동시대의 이야기를 다룬다는 것에 대한 기대감으로 시청률이 높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은 단순한 전쟁영웅이 아니었다. ‘장수된 자의 의리는 충()을 쫓아야 하고, ()은 백성을 향해야 한다.’는 영화 명량속의 대사처럼 조선 수군의 총사령관이면서도 백성 모두의 어버이 역할을 했다. 오직 나라만을 생각하며 어리석은 왕과 전쟁의 불바다 속에서도 권력다툼을 멈추지 않는 권신들의 시기를 받으면서도 모든 책임을 스스로의 어깨에 진 채 절망할 수밖에 없는 싸움에서도 이겼다. 충무공 시대의 민중이나, 지금의 민중이나 모두 충무공을 존경하고 사랑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정재영 기자  jyjung37@mjk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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