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법과 독배 - 정경뉴스

▲ 신 동 준

21세기정경연구소장

야권의 ‘잠룡’으로 급부상한 박영선 원내대표가 위기에 처한 야당의 구원투수로 나서 비상대책위원장 자리를 맡았다. 최초의 여성 법사위원장이자 여성 원내대표라는 진기록이 야당의 기대를 한몸에 모은 결과로 보인다. 그녀는 취임사에서 “다들 독배를 마시라고 하니 마시고 죽겠다!”며 결의를 다진 바 있다.

많은 사람이 이 말을 듣고 ‘소크라테스의 독배’를 연상했을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너 자신을 알라!’는 말로 유명하다. 원래 이는 델포이의 신전에 새겨진 말로, 소크라테스는 이 말을 인용해 하나를 알면 열을 아는 것처럼 떠벌리는 소피스트들에게 ‘돌직구’를 날렸다. 자신의 무지를 깨달으라고 촉구한 것이다. 그러나 그는 ‘악법도 법이다!’라고 말한 적이 없다. 이는 원래 ‘법은 엄하지만 그래도 법이다’라는 로마법언에서 나온 것이다.

와전의 단초는 경성제대 교수 오다카도모오(尾高朝雄)가 제공했다. 그는 1937년에 펴낸 ‘법철학’에서 소크라테스가 독배를 든 것은 실정법을 존중했기 때문이라며 ‘악법도 법이므로 지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주목할 것은 그 역시 소크라테스가 그런 말을 했다고 주장한 적이 없다는 점이다. 와전의 책임은 전적으로 광복 이후 법무부장관 등을 지내며 한국 법철학의 태두를 자처한 오다카의 제자 황산덕 등이 져야 한다.

지난 2005년 서강대의 강정인 교수는 이를 신랄히 비판하면서 제자 크리톤의 탈옥 권유를 뿌리친 점에 주목해 소크라테스는 진리를 지키기 위해 독배를 마셨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 또한 지나쳤다. 당시 탈옥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비록 타락하기는 했으나 아테네의 민주주의 체계를 존중한 결과로 해석하는 게 옳다.

소크라테스의 제자 크세노폰이 쓴 〈회상록〉에 따르면, 당시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유무죄를 논하는 자리에서 “왜 새점을 치는 자들은 내버려 둔 채 나만 신을 모독했다고 비난하는 것인가”라고 항변했다. 30표의 근소한 차로 유죄가 결정된 후 형량을 논하는 자리에서는 자신을 국가원로로 모셔야 한다며 더욱 거칠게 저항했다. 무죄를 확신하는 아테네 시민이라면 그 누구라도 그랬을 법한 항변을 한 셈이다.

그가 독배를 마신 것은 타락한 아테네 민주주의 체제에 대한 절망감의 표시이기도 하다. 또 다른 제자 플라톤이 쓴 ‘소크라테스의 변명’에 나오는 자문자답 형식의 대화가 이를 뒷받침한다. 소크라테스는 ‘국법’이라는 가상의 화자를 등장시켜 자문자답하는 대목에서 국가의 결정이 무시될 경우 나라는 존속할 수 없다는 ‘국법’의 주장에 대해 “국가는 공정하지 못한 선고를 내렸다”고 항변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 부모의 결혼을 허용해 그 자식을 훈육했으니 소크라테스 역시 국가의 자녀에 해당한다는 ‘국법’의 주장에 대해 그는 이같이 대답했다. “그렇다. 국가의 처벌을 받았을 때는 징역이든 사형이든 조용히 참고 따르지 않으면 안 된다.” 소크라테스가 조용히 독배를 마신 이유가 여기에 있다. 타락한 아테네 민주주의 체제에 경종을 울리고자 한 것이다. ‘진리’ 운운하며 미화하는 것은 또 다른 왜곡에 해당한다.국가공동체와 개인 아리스토텔레스는 바람직한 삶을 크게 ‘철학적 삶’과 ‘정치적 삶’으로 나눈 바 있다.

‘철학적 삶’은 공동체 구성원의 사권(私權) 및 사익(私益), ‘정치적 삶’은 공동체 전체 차원의 공권(公權) 및 공익(公益)을 중시한다. 철학과 정치 사이의 긴장을 언급한 것이다. 해결책은 시대 및 나라에 따른 공동체 구성원의 합의에 기댈 수 밖에 없다. 양심적 병역 기피자에 대한 병역부과 논란이 실례이다.

그러나 난세에는 공권과 공익을 앞세울 수 밖에 없다. 중국이 마약사범을 무조건 사형에 처하는 게 그렇다. 다시는 아편전쟁의 전철을 밟지 않겠다는 국가의지의 표현이다. 당대 최고의 현자인 소크라테스가 독배를 마신 것은 아테네 민주주의가 극도로 타락했다는 명백한 증거다. 실제로 아테네는 이후 패망의 길로 치달았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지적처럼 민주주의가 타락하면 군주제나 공화제의 타락보다 더 해로울 수 있다.

‘세월호법’으로 박영선 비상대책위원장이 ‘독배’를 마시는 것은 한국의 의회정치가 그만큼 심각하다는 징표이다. 경종을 울리기 위해 소크라테스처럼 기꺼이 ‘독배’를 마시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될 것이다. 세월호 사건을 계기로 시대적 과제가 된 ‘관피아 척결’에 여야가 따로 있을 수 없다. 정치권 모두 위국위민(爲國爲民) 이념을 되새겨볼 일이다. 그렇지 못할 경우 커다란 부메랑을 맞을 수밖에 없다.

신동준 21세기정경연구소장 mjknews@mjk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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