굴착기가 돈다. 땅속을 헤치며 나아가는 모습이 눈앞에 선하다. 20년 세월이 지난 현재 김태성 회장(73)의 기억은 어제처럼 선명하다. 김 회장은 한국터널기술협회를 이끌어온 소위 ‘굴쟁이’, 그가 털어놓는 이야기들은 대한민국 터널 토목공사의 역사다.

 

▲ 인천국제공항으로 향하는 강서구 개화터널의 모습.

터널공법의 산 증인, 내 눈엔 굴만 보인다

김 회장은 1980년대를 거치며 국내 경제발전을 지켜본 산 증인으로 그가 걸어온 길이 터널 굴착공법의 발전과 맞닿는다. 김 회장은 1986년 해외로부터 들여 온 실드공법(shield driving method)으로 국내 첫 토목공사를 시작했다. 실드공법은 폭약을 설치해 굴을 파는 기존 방식과 다르다. 소음과 진동, 공해가 적어 비교우위를 지닌다. 앞으로는 굴착작업을 하면서 뒤로는 터널 내벽을 튼튼하게 만드는 복공작업이 동시에 이뤄지는 방식이다. 세그먼트(segment)라 불리는 구조물을 설치함으로써 굴의 붕괴를 막는다.

이 굴착방식은 현재 국내 터널 공사 대부분에서 사용하고 있다. 김 회장이 해외에서 공법을 들여와 연구개발 끝에 뿌리를 내렸다. 토목 공사 현장에서 그의 선견지명이 여전히 빛을 발휘하는 이유다. 산(山)을 꿰뚫는 도로 터널부터 서울시를 관통하는 지하철, 통신구(通信溝)와 전력구(電力溝)까지 실드공법의 적용범위는 국토 전체를 아우른다.

 

▲ 실드공법의 권위자인 한국터널기술협회 김태성 회장.

그가 터널 공사에 인연을 맺게 된 계기는 한반도 분단 상황과 관련 있다. 남북한 전쟁을 대비해서 김 회장은 에너지 비축창고를 1970년대 말에 건설한다. 장장 100일에 걸쳐 한국이 유사시 사용할 원유와 LPG 가스 보관소다. 지하 창고라 부르는 장소를 그의 손으로 만들었다. 광대한 양의 에너지 저장소 공사는 세계 최대 규모이자 국내 최초로 시도됐다.

이러한 원유비축 시설공사에서 김 회장은 책임소장의 지위를 맡았다. 당시 국내 기술진에게 바다 밑 지하 저장소 건설은 ‘가보지 않은 길’이었다. 스웨덴과 노르웨이의 선진 기술을 독학하면서 김 회장은 인생의 전환점을 맞는다. 국가기밀로 이뤄진 공사는 위장을 통해서 위치를 숨기고 비밀리에 준공하였다. 해저에 마련된 지하창고를 보면서 이때부터 김 회장은 눈앞에 ‘굴’만 보게 된다.

이윽고 김 회장은 1982년 국내 유일의 터널전문시공연구소를 설립한다. 그가 대표를 맡은 뒤 ‘정선-평창 간 도로 터널’과 ‘광양 황금철도 터널’ 등 굵직한 공사를 성공리에 끝낸다. 이외에도 ‘강릉 수력발전 수로터널’, ‘태백 광역상수도 수로터널’ 등이 그의 작품이다. 이후 터널공사에 관한 열정으로 일본에서 미래 청사진을 마련한다. 각종 국제회의에 국내 대표로 참가하며 김 회장은 저비용·친환경 공사기법을 찾는다. 그 와중에 결국 그는 실드공법에 눈을 돌리게 된다.

“50km에 달하는 일본 ‘하꼬다데’ 세이칸 해저터널 국제회의에 참석하고 새로운 공법을 연구했습니다. 그전까지 국내 터널 공사는 폭약을 사용했습니다. 바위에 구멍을 내고 발파 작업으로 굴을 팠죠. 지반이 약한 곳에서 사용하기 어려운 공법입니다. 게다가 폭파에 따른 미세 분진이 환경오염 문제를 일으킵니다. 비용도 만만치 않게 들고요. 반면, 실드는 공시비용을 낮추고 안전한 방식으로 땅속 공간을 만듭니다.”

실드공법에 매료된 김 회장은 일본 죽중건설 KOMATSU 기계와 기술제휴에 나선다. 해외에서 장비를 도입함으로써 국내에 새로운 방식을 뿌리내리게 할 목적이었다. 당시 일본의 굴착 기계와 기술자는 세계 최고 수준에 있었다.

암울한 조짐, 부산 통신구 터널 공사

실드공법을 적용한 1986년 부산 광복동 전력구 공사는 성공리에 끝난다. 1,035m에 달하는 터널 공사가 국내 기술진에 의해서 준공된다. 한국중공업(두산중공업의 전신)과 ㈜태명실업, 김 회장이 세운 죽림건설이 협력하면서 국내 터널 공사의 전기를 마련했다.

“한국중공업이 원청회사가 되고 죽림건설이 전문시공업체가 됐습니다. 공사에 관한 장비와 기술력은 죽림건설에 있었습니다. 실드공법에 쓰이는 세그먼트 제작과 공급은 태명실업이 맡았죠. 지금은 회장이 된 김영일 사장이 태명실업 지위자였습니다. 그는 죽림건설에 세그먼트를 납품했죠. 공사에 사용된 실드장비는 리스를 통해서 해결했습니다. 공사에 필요한 부대 장비는 죽림건설이 자금을 마련해 제작한 뒤 사용했습니다.”

 

▲ 해산령 정상의 최북단 최고보 최장 터널인 해산터널을 2013 전국 자전거동호회 리더포럼 참가자들이 지나고 있다.

이처럼 죽림건설은 장비를 준비하고 공사 인원의 기술교육도 맡았다. 실드공법에 관한 전문지식이 부족했던 터라 국내 기술진 교육도 공사와 함께 필요했다.

하지만 부산 광복동 전력구 공사에 이어 시작된 통신구 공사는 애물단지가 됐다. 태명실업이 세그먼트를 한국중공업에 직접 납품하겠다는 의도를 드러낸 직후다. 전력구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500m 길이의 터널이었는데 문제가 생긴 것이다. 결국 죽림건설은 터널을 완성하지 못한 채 파산의 길을 걷는다. 공사 시작 9개월 만이다. 물론 회사 대표였던 김 회장 역시 파국으로 치닫는다. 미완(未完)의 공사로부터 나온 한(恨)이 이렇게 시작됐다.

지연되는 공사, 권한 없이 책임만 전가

김 회장의 말에 따르면, 부산 통신구 공사는 지연에 지연을 거듭했다. 착공 뒤, 9개월간 공사 진척이 더뎠다. 준공 일자가 코앞인데, 진행률은 절반에도 미치지 못했다. 더욱이 세그먼트에 균열이 생기고 있었다. 공사를 발주한 측에서는 불호령이 떨어졌다. 원인을 분석해서 당장 보고하라고 난리가 났다.

3년 전 같은 공법으로 전력구 공사를 성공리에 끝낸 김 회장으로서는 답답한 심정이었다. 결국 터널 보강재로 쓰인 세그먼트가 이유 없이 금이 가면서 김 회장은 공사 실패의 원흉이 되었다. 수많은 질타가 이어졌고, 김 회장을 보는 시선에 불신이 깊어갔다.

공사 인원과 장비 모두가 죽림건설에 속해 재정상황이 악화 일로를 걷게 되고, 김 회장은 정신적 스트레스에 시달린리게 했다. 게다가 실패의 책임을 물어 죽림건설과 김 회장이 공사에서 빠지라는 요구를 받는다. 그는 결단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김 회장은 파산신청을 한다. 수십 억에 달하던 그의 재산은 찰나에 사라지고 말았다. 김 회장이 제외된 뒤, 통신구 공사는 이상하리만큼 원활하게 진행된다.

“전력구와 달리, 통신구 공사에서는 태명실업이 우리를 거치지 않았습니다. 원청회사였던 한국중공업에 세그먼트를 직접 납품했죠. 이유를 알 수 없었습니다. 장비의 리스 보증도 자청해서 하겠다고 나섭니다. 공사를 관리·감독해야 할 책임은 여전히 죽림건설에 있었습니다. 책임만 있고 권한이 없는 상태가 된 겁니다.”

“엉뚱한 세그먼트, 균열 야기”

자본주의 사회에서 파산은 경제적 자살을 뜻한다. 자신뿐 아니라 가족 전체가 헤아릴 수 없는 고통을 겪는다. 자녀들은 때를 놓쳐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한다. 물론 정상적인 사회생활이 불가능하다. 김 회장은 스스로 꿈을 저버렸다. 실의에 빠짐으로써 회복의 의지를 잃고 하루에도 수십 번 죽음을 생각하였다. 기술자로서, 과학자로서 전도유망했던 젊은이가 그렇게 날개를 잃었다.

훗날 태명실업 영업부장으로 일했던 이가 김 회장을 찾아온다. 가져온 보따리에 서류 더미가 가득했다. 김 회장에게 억울하겠다는 말을 남기고 그는 미국행을 택한다. 갑자기 찾아온 이유를 알 수 없던 김 회장은 보따리의 서류를 보고서야 공사 실패의 이유를 깨달았다.

“엉뚱한 세그먼트가 공사에 쓰였다는 사실을 알아냈습니다. 전력구와 통신구의 지반이 다른 데도 같은 종류의 세그먼트를 사용한 겁니다, 이것 때문에 균열이 생겼습니다. 세그먼트 납품업체에 공사 실패의 원인이 있다는 증거였습니다.”

세그먼트는 겉모습이 비슷해도 내용물을 이루는 철근 구조에 차이가 난다. 지반 상태에 따라 속 모습이 달라진다는 이야기다. 결국 납품 업체가 전력구와 통신구 공사에서 같은 세그먼트를 사용했다는 것이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아울러 김 회장의 억울한 누명이 벗겨지는 순간이기도 했다.

“지금에서 돌이켜보면 세그먼트 납품 업체였던 태명실업은 실드공법 장비를 원하는 듯했습니다. 아울러 공사의 시공사가 되려는 의도를 보였죠. 말 그대로 죽림건설을 소유하고자 했습니다. 자신들이 죽림건설이 됨으로써 공사를 독점하고 싶었겠죠. 태명실업은 공사에서 죽림건설을 배제한 채 세그먼트 공급처를 한국중공업으로 돌립니다. 또 죽림건설이 리스한 실드장비의 잔액 보증을 자진해서 맡겠다고 나섭니다. 지금 보면, 모든 게 죽림건설의 파산을 전제로 한 절차였습니다.”

 

▲ 울주군 천성산터널 경부고속철도 대구~부산 구간 터널 공사 현장.

김 회장은 당시에도 공사가 끝난 뒤, 실드 굴착 장비를 돌려받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리스 비용을 대신 내겠다고 자처한 태명실업은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회사의 자산으로 잡아서 소유물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실드공법을 국내에 도입하고 장비까지 마련했던 김 회장은 위치조차 알 수 없게 되었다. 결국 굴착 장비는 그가 모르는 사이에 다른 업체로 팔리게 된다. 불과 2년 전 일이다. 그동안 장비를 보게 해달라는 요청을 수없이 했지만 모두 물거품이 됐다. 태명실업의 석연치 않은 모습이 더욱 의심을 살 수밖에 없는 대목이다.

시간이 흘렀지만, 터널의 꿈은 지속

김 회장의 얼굴은 어느새 일흔을 넘긴 노인의 모습이 됐다. 터널공법에서 국내 최고 기술력을 지녔던 사나이는 이제 황혼에 있는 것이다. 그가 처음 도입한 실드공법은 20년 이상 국내 터널 공사 현장에서 수없이 사용됐다. 발파 공법보다 우위에 있다는 방증이다. 토목공사 현장에서 공사비용을 줄이고 환경오염을 막을 수 있었던 건 김 회장 덕분이다. 신기술을 연구하고 들여왔던 그의 혜안이 빛나는 순간이다.

이제 실드공법과 장비에 관한 애착은 지속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인생의 마지막 항로에서 김 회장은 처음 꿨던 꿈을 놓지 않으려 한다. 그가 세웠던 터널의 꿈은 실드공법과 함께 다시금 시작점에 놓여 있다. 억울한 사건으로 잠시 꿈을 접어야 했던 김 회장의 행보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공사방식에 우위를 지닌 실드공법, 이를 국내에 들여온 김 회장은 대한민국 터널의 역사를 써가는 중이다.

“한국터널기술협회를 이끌며 국가발전에 기여할 계획을 세우고 있습니다. 정부 부처에서 제의가 들어와 터널 건설에 관한 계획안을 제출하기도 했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각에 마음이 바쁜데, 검토가 느린 듯합니다. 올해가 가기 전에는 동안의 계획을 담아 국제포럼을 개최할 예정입니다. 현재 사회 이슈가 되는 사용 후 핵연료 처리라든지, 해저터널 건설 등에서도 할 일이 많습니다. 장비 문제 해결이 우선인데, 빠른 처리를 위해서 관계 기관에 협조를 요청할 계획입니다.”

이은구 기자  cin3004@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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