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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흔적, 북방영토- 간도(間島)
김혜정 | 승인 2014.08.06 18:32|(173호)

 

 한국과 중국 사이에 놓인 땅, 간도는 역사적으로 고구려와 발해의 영토였다. 간도는 지리적으로 서간도(압록강 지역)와 동·북간도(두만강 지역)로 구분할 수 있지만, 지금은 조선족이 거주하고 있는 연변자치주를 중심 지역으로 잡고 있다.

 간도 지역의 역사를 살펴보면 17세기 초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누르하치(Nurhaci, 努爾哈赤, 1559 ~ 1626)가 후금을 건국하고 세력을 확장하면서 압록강과 두만강 연변 및 백두산 일대에 거주하던 주민들을 흡수하여 중원으로 이동하였다.

 그러자 이 지역은 일종의 공백 지대가 되었다. 이에 평안도와 함경도 북변의 조선인들은 삼을 캐고 사냥을 하거나 토지를 개간하는 등 이곳에서 적극적인 경제활동을 하였다. 이들의 활동이 활발해지면서 청나라 사람들과 자주 접촉하게 되었고 서로 약탈을 하거나 심지어 살인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1668(현종 9년)에 청은 한족의 만주 이주를 금한 이래 심양 동쪽 지역에 봉금지대(封禁地帶)를 설정하고 자국민의 거주를 금하였다. 그리고 매년 일정 기간에 제한된 인원만을 이곳에 보내어 초피(貂皮)나 인삼 등을 채취하도록 하였다.

 조선 또한 두만강, 압록강을 넘어 청의 봉금지대에 왕래하는 것을 금하였다. 그러나 국내외의 초피와 인삼의 수요가 증가하고 이를 구하기 위한 조선인들의 활동이 활발해지면서 청나라 사람들과 충돌사건이 증가하였다.

 1710(숙종 36년)에는 평안도에 거주하는 이만지(李萬枝) 등이 압록강을 건너와 청나라 사람 5명을 타살하고 삼과 물품을 약탈한 사건이 일어났다.

 청나라 황제는 두 나라의 경계가 불명확하여서 이와 같은 문제가 발생했다고 보고 목극등(穆克登)을 보내어 조선과 공동으로 조사토록 했다. 1712년에 조선과 청은 ‘서쪽은 압록강, 동쪽은 토문강을 경계로 한다(西爲鴨綠 東爲土門)’는 내용의 백두산정계비를 세우며 조선과 청의 경계를 처음으로 명문화하였다.

 그런데 후에 ‘토문(土門)’이라는 두 글자가 문제가 된다. 정계비에서 말하는 ‘토문강’을 어느 곳으로 해석하느냐에 따라 두 나라의 이해관계가 크게 달라지기 때문이다. ‘토문강’을 송화강의 지류로 해석한 한국과 달리 중국은 토문강(土門江)-도문강(圖們江)-두만강(豆滿江)은 같은 발음임을 예시하며 동일한 강이라고 주장하였다.

 이에 대해 조선은 토문강을 중국의 여러 지도에도 송화강의 상류로 표시된 점을 증거로 제시하며 두만강과는 엄연히 다른 별개의 강이라고 맞섰다.

 국경선 회담은 정계비를 세운 이후 두 차례(1885, 1887)에 걸쳐 이뤄졌지만 문제를 명확하게 해결하지 못했다.

 백두산정계비 설치 이후 조선에서는 백두산을 왕조의 발상지로 인식하며, 이 산에 대해 신성성이 강화되고 위상이 높아지게 되었다. 백두산을 직접 답사하고 기행문을 남기는 사례가 크게 늘어났으며, 고지도에 그대로 반영하였다. 이전까지는 대체로 백두산과 압록강, 두만강의 큰 줄기만으로 중국과 조선을 구분하고 있고, 두만강과 토문강의 명칭도 구별하지 않은 채 쓰고 있었는데, 정계 이후에 그려진 북관 지역에 관한 지도들은 대부분 두만강 이북 지역에 ‘고려경(高麗境)’이라고 기록하였다.

 토문강과 두만강을 명확히 구분하여 표기하는 경향이 있었다.

 조선 조정은 1712(숙종 38년) 백두산 정계로 두만강과 백두산, 압록강 남쪽 전역을 조선의 강역으로 완전히 확보했다고 판단하자 북변 일대의 개간과 주민 거주를 허용하고 행정구역을 정비하였다.

 또한 청나라 사람들의 출입을 철저히 단속하고 청 중앙정부에 직접 통보하여 변금(邊禁) 단속을 강력히 요구하는 사례가 많아지는 등 북변수호의 의지가 어느 때보다도 높았다.
 
 이처럼 조선에서는 간도 관리사를 파견해 우리 민족을 보호하려고 했다.

 그러나 일본 제국주의는 조선의 외교권을 박탈한 을사늑약(1905년)으로 간도 지역에 통감부 파출소를 설립(1907년)하여 관할하였다.

 이후 일본은 러·일 전쟁으로 러시아의 이권을 이어받아 간도 지역에 대한 침략을 노골화하면서 1909년 7개 조항의 ‘간도에 관한 청·일협약(간도협약)’을 맺어 간도 지역의 영토권과 4대 이권을 청나라에 넘겨줬다.

 그런데 일본의 통감부 임시 간도 파출소 잔무정리소가 제작한 <백두산정계비부근 수계조사도(白頭山定界碑附近 水系調査圖)>(1909년)를 보면 백두산을 중심으로 압록강, 두만강, 송화강(토문강)과 그 지류의 흐름을 상세하게 표시하고 있다.

 백두산 부근에서 동북방향으로 흐르다가 다시 북쪽으로 꺾여 송화강과 합류하는 하천에 ‘토문강’이라는 이름을 명기해 놓았고, 동쪽으로 흐르는 강에는 ‘두만강’이라고 적어 토문강과 두만강이 전혀 다른 강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이는 일제가 설치했던 간도 파출소가 업무를 마감하면서 제작한 공식 보고서이고, 토문강이 두만강과 다르다는 점을 밝히고 있다는 점에서 간도를 청나라에 넘겨주며 두만강을 대한제국과 청의 국경으로 삼아 간도에 대한 중국의 영유권을 인정했던 1909년의 간도협약이 근거가 없는 것이었음을 스스로 인정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당시 간도 지방 주민조사로 나타난 한국인은 8만 2,900여 명이고, 청국인은 2만 7,300여 명이었다. 이는 간도가 우리의 역사와 전통문화가 계승되고 있었던 지역임을 증명한다.

 이처럼 간도는 우리 민족의 역사가 숨 쉬고 있는 소중한 옛 영토이다. 우리가 이 땅에 대해 아무런 관심을 갖지 않고 체념과 망각 속으로 묻어두고 있을 때, 중국은 동북공정이라는 거대한 프로젝트를 통해 간도는 물론 한반도와 주변 해역까지 넘보는 전 방위 공세로 치닫고 있다.
 
 최근 동북아의 정세는 미국과 중국을 중심으로 새로운 틀을 짜면서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고 있다.

 그 이면에는 자국의 이익과 영토문제가 자리잡고 있다. 그 어느 때보다도 대한민국이 외교적인 역량을 발휘해야 할 시점이다.

 경희대학교 혜정박물관은 광개토대왕 추모비 건립 1,600주년 되는 해를 기념하고 북방영토에 대한 인식을 제고하기 위해 7월 22일에서 9월 30일까지 혜정박물관 특별전시실에서 ‘삶의 흔적, 북방영토-간도’ 展을 개최한다.

 이번 전시는 중국의 동북공정에 대응할 수 있는 논리를 개발하고, 북방영토에 대한 국내의 관심과 국민적 의식을 고취하기 위해 기획되었다. “잃지 않으려면 잊지 않아야 한다”는 말이 있다.

 일부러라도 시간을 내어 참관하기를 희망한다. 이런 행사에 수많은 사람이 참여할 때, 참여한 사실 자체만으로 매스컴의 주목을 받게 되고, 간도에 대한 한국인의 관심을 중국을 위시한 세계에 알릴 수 있기 때문이다.

김혜정  news@mjk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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