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경뉴스=전혜선 기자] 외교관이 아니더라도 문화활동을 통해 민간외교를 하고 있는 자랑스러운 한국인들이 많다. 그 중 한 명이 일본에서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는 나전공예 작가 길정본 원장이다. 2008년 한국언론인연합회가 선정한 ‘제8회 자랑스런 한국인대상’ 전통공예부문상 수상자이기도 한 그녀는 오랫동안 일본 전국 순회 전시회를 해 오면서 이제는 후원자와 고정 팬이 있을 정도로 일본에서 더욱 유명한 예술가로 인정받고 있다. 그런 그녀가 팔순이 가까운 나이에도 불구하고 나전공예 불모지인 구마모토(熊本)에서 작품전시회를 열며 또 다른 도전을 감행해 주위를 놀라게 했다. 여느 전시회와는 다르게 구마모토에서의 ‘한국나전공예작품전’은 일본 학생들의 현장학습이 주를 이룬다는 것이 큰 특징이다. 이번 전시회 현장학습을 통해 일본의 미래인 일본 학생들에게 한국을 알리고 이해시키는 계기로 삼고자 하는 것이 그녀의 생각이다.

▲ 만개한 벚꽃만큼 화사한 미소를 보이는 길정본 원장.

구마모토 현립미술관 전시관은 길정본 원장의 나전공예 작품전을 보기 위해 현장학습을 온 구마모토 초중고 학생들로 대성황을 이루고 있었다.

길 원장은 “일본 전역에서 수많은 전시회를 열었지만 이번 구마모토에서의 전시회는 특별한 의미가 있다. 보석처럼 휘황찬란한 나전공예 작품을 통해 우리의 문화를 알리고 외화를 벌어들이는 것으로 그칠 수도 있었지만, 한일 양국의 장래를 생각해보면 새로운 시대를 이끌어갈 일본 학생들에게 한국의 문화를 보여주고 한국을 알게 하는 것이 무엇보다 우선이라는 생각이 들었다”며 30여 년 전 일본에 첫발을 디디고 나전공예를 알리기 위해 고군분투했던 젊은 날의 열정이 그대로 느껴지는 눈빛으로 말했다.
 
길 원장의 나전공예 작품전시회는 구마모토 현, 구마모토 시, 구마모토교육위원회의 적극적인 후원으로 구마모토 현립미술관에서 3월 2일부터 3월 24일까지 길 원장의 작품 80여 점과 몇몇 장인들의 작품을 선보였다.

반짝반짝 윤이 나는 자개 고유의 빛깔이 하얀 벽의 삭막하기만 한 전시실을 화사하게 빛내고 있었다. 260cm의 대형 독수리상에서부터 작은 브로치에 이르기까지 어느 것 하나 눈길을 뗄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길 원장의 나전공예 작품이 남들과 다르게 평가받는 이유 중의 하나는 십장생 무늬에 그치지 않고 세심하고 정교한 동양의 미가 화려한 서양적 형식미를 넘어서서 글로벌 시대에 걸맞는 보편적 디자인을 구현해냈다는 점이다.

▲ 구마모토 현립미술관 ‘길정본 나전공예작품전’ 오픈식 날 길정본 원장(좌로부터 세번째)과 (좌로부터)주일한후쿠오카총영사 조정원 , 구마모토상공회의소회두 타가와켄세이, 구마모토캐릭터 쿠마몬, 구마모토 현지사 카바시마이쿠오, 구마모토 일한문화스포츠협회회장 아라키아키히로, 한일 친선협회회장 오응준.

한국의 문화와 예술을 사랑하는 이들

구마모토는 역사적으로 오래 전부터 한국과 다양한 분야에서 인연이 있는 지역이다. 그래서 한국어를 비롯해 한국 문화에 관심이 많은 일본인들로 가득한 지역이기도 하다.
 
길 원장은 “나전공예가 생소한 지역이라 비록 다른 전시회에 비해 오픈 첫날의 관람객 수는 그리 많지 않았지만 언론의 찬사와 구전으로 인해 하루 20~50여 명의 단체들이 수차례 방문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구마모토 각 학교의 학생단체가 현장학습을 위해 전시관을 찾아 한국의 나전공예에 감탄하며 많은 관심을 갖고 제작과정을 열심히 기록해 가고 있다”라고 말했다.
 

▲ 현장학습차 전시장을 방문한 구마모토 학생들에게 작품 설명을 하고 있는 길정본 원장.

구마모토 중앙고등학교 2학년에 재학 중인 아키코 쿠미코는 “한국의 나전공예는 매우 아름답고 대단한 예술작품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 아름다움의 정도를 뭐라 한마디로 표현할 수가 없다. 큐레이터로부터 나전칠기 제작과정을 들었는데 상당히 놀랐다. 작품 하나를 완성하는 데 그토록 많은 정성과 시간을 들여야 하는지 몰랐다”며 한국의 나전공예에 대해 더 관심을 갖고 배우고 싶다고 말했다.

구마모토 현 의원을 사로잡은 진정한 한국문화대사

전시회의 수많은 인파들 속에서 유독 인물이 훤칠한 남성 한 분이 눈에 띄었다. 길 원장과는 이번 구마모토 전시회를 계기로 친분을 갖게 된 아라키 구마모토 현 의원이다.

아라키 의원은 “나전공예를 떠나서 그녀의 인간미를 높게 평가한다. 2011년 3월 일본 대지진이 일어났을 때 한국에서 라면, 김, 이불 등을 보내주고 그 당시 일본인들을 위로하며 함께 지내는 모습을 보았다. 마음이 훌륭한 사람이다”라며 “길 원장은 개인적으로는 편안하고 푸근한 사람이며, 대외적으로는 한일 관계를 이어나가는 민간외교 사절단으로서 한국에서 훌륭한 평가를 받아 마땅한 사람이다”라고 말했다.
 
독도문제로 민감한 일본 고위직 관료들도 길 원장과는 아름다운 예술품을 통한 문화 친선관계로 무척 뜻깊은 친분을 나누고 있다. 전시회를 통해 문화예술에 대하여 토론하며 불편한 한일 양국 간의 관계를 친선관계로 변화시키는데 큰 공을 세우고 있는 그녀. 그야말로 진정한 대한민국의 외교관이 아닐까?

▲ 길정본 원장(가운데)과 아라키 구마모토 현 의원(좌), 모리 도시코 이사장이 나전칠기에 대해 얘기하며 웃음꽃을 피우고 있다.

생소했던 나전공예에 빠져들어

구마모토 사람들에게 나전공예는 생소하기 그지없는 분야이다. 유치원·초·중·고·대학교를 운영하며 구마모토 현 교육협회 1인자로서 자리매김하고 있는 모리 도시코 이사장 또한 마찬가지였다.

“일본에서는 볼 수 없는 한국의 나전공예 문화에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다. 길 원장의 작품을 보고 온몸의 전율을 느꼈다. 길 원장의 성품과 이미지가 작품 속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고 말한 모리 이사장은 길 원장의 대단한 작품들을 사람들에게 널리 알리고 싶어 자개로 만든 브로치를 많이 구입해 주변 지인들에게 선물했다고 한다.
 
“브로치 외의 다른 작품을 아직 구입하지는 않았지만 앞으로 하나씩 구입해나갈 생각이다. 길정본 원장의 작품은 소장가치가 매우 높기 때문이다”라며 앞으로도 길 원장과 친분을 유지하며 나전공예에 대한 애정도 쌓아나갈 것이라 말했다.
 
이어서 “교육계에 몸담고 있는 사람으로서 ‘일본학생 현장학습’이 특징인 이번 전시회가 각별한 의미로 다가온다. 길 원장의 나전공예가 한일 양국의 문화교류에 가교역할을 할 것으로 보인다”며 맥이 끊어질 위기에 처한 한국의 나전공예가 일본에서라도 누군가를 통해 이어질 수 있으면 좋겠다는 아주 큰 욕심을 보였다.

심청전·흥부전, 남들과 다른 길 원장만의 무기

의료법인 백십지회의 도미니가 가즈코는 후쿠오카와 사세호에 3천여 명의 직원을 보유하고 있는 종합병원 3곳의 이사였다가 지금은 아들에게 물려주고 고문으로 활동하고 있다.
 
그는 “길정본 원장은 한마디로 인간 보물이라 할 수 있다. 성품은 물론이거니와 그녀 작품의 매력 또한 빼놓고 말할 수 없다. 나는 특히 흥부전, 심청전 등과 같은 한국 고전문학의 이야기가 담겨 있는 작품이 마음에 들어 고전문학 작품을 시리즈별로 사다보니 길 원장의 작품을 꽤나 모았다. 다른 작품들도 물론 좋지만 한국 고전문학의 이야기가 자개로 새겨졌다는 것이 신기했고, 보면 볼수록 진한 애정이 느껴진다”라고 말했다.

한국에서 태안 기름유출사고 당시 기부한 이유에 대해 묻자 “길 원장과 친분이 두터워지면서 한국이 좋아졌고 한국의 어려움에 마음이 아팠다. 그래서 길 원장을 통해 기부금을 전달하게 됐다”고 말했다. 여기서도 길 원장의 민간외교 능력이 발휘된 것이다.

도미니가 고문과 같은 날 전시관를 찾은 기하라 관장(히로시마 렌게이코우지 절)은 길을 원장의 작품 중 거북이 함에 애정을 쏟고 있었다.

이유를 묻자 기하라 관장은 “렌게이코우지 절의 심벌마크가 거북이이기 때문이다. 거북이가 바다에 살듯이 바다 같은 넓은 마음을 품으라는 의미인데 길 원장의 거북이 함은 어미 거북이 위에 새끼 거북이가 업혀 있는 형상으로 여기에는 가족 화목의 의미까지 있어 더더욱 마음에 들었다”라며 많은 이들이 볼 수 있도록 절 본관에 놓았다고 말했다.

전통문화예술의 비애, 정부의 아낌없는 지원 갈구

길정본 원장은 “한국 정부는 그동안 공예 예술 분야를 소홀히 했다. 일본은 일본인도 아닌 나에게 이토록 많은 관심과 지원을 아끼지 않고 있는데 말이다. 전통과 역사가 깊은 우리나라의 나전공예가 사장된다는 것은 너무나 안타까운 일이다. 정부가 우리문화 전통성 살리기에 좀 더 힘을 실어줬으면 하는 바람이다”라며 열악한 우리 전통문화예술의 현실을 전했다.

길 원장은 강연마다 나전공예를 알리는 것에 덧붙여 한일 간의 국제적인 문제에 대한 말도 빼놓지 않는다. 민감한 사안에 대해 언급할 때마다 등에서 식은땀이 흐르기도 한다는 그녀는 한국을 누구보다 사랑하는 애국자이다.
 
“일본은 나에게 무척이나 고마운 나라이다. 하지만 한국인으로서 할 말은 해야 한다는 신념이 있다. 한일 양국의 갈등이 심할수록 빈번한 문화교류를 통해 서로에 대해 잘 알아야 정치·사회적인 문제에 대해서도 제대로 할 말도 할 수 있는 것이다”라며 민간외교 선구자의 모습을 보였다.

이번 구마모토 현립미술관 전시회가 끝나면 앞으로 가고시마, 오이타, 후쿠오카, 야츠시로 시에서 전시회가 이어진다. 여기저기서 불러주는 곳이 많아 행복한 비명을 지르고 있는 그녀. 빠듯한 전시회 일정에 체력적으로 힘에 부치기는 하지만 한국의 나전공예를 알리는 데 투철한 사명감을 보이며 한국의 당당한 여류작가로서 식지 않는 열정을 드러냈다.

▲ 구마모토 학생들이 나전공예 전시장을 관람한 뒤 길정본 원장과 기념사진을 촬영하면서 파이팅을 외치며 기뻐하고 있다.

후계자 양성의 어려움, 안타까움을 자아내

30여 년 전만 해도 후계자 양성과정을 밟고 있는 학생들도 있었고, 길정본나전공예원의 직원도 수백 명에 달했다. 하지만 밀려오는 서양 문물에 자리를 내주고 관심을 잃게 되면서 점차 후계자 양성에도 상당한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길 원장의 스태프 박모 씨는 “선생님이 손을 놓으시면 한국의 나전공예는 결국 사장되고 말 것이다. 나전공예는 인고의 시간 속에서 피어나는 예술이다. 어느 분야든 마찬가지겠지만 특히 이 분야는 더더욱 인내와 끈기가 없으면 해낼 수 없다. 수작업 과정에 있어 고도의 기술력을 요하므로 오랜 시간 훈련이 필요한데 요즘 젊은이들은 그 과정을 참아내지 못한다. 우리의 전통공예를 계승할 수 있는 교육 시스템이 제대로 갖춰지는 일이 시급하다. 뿐만 아니라 한국 전통문화예술의 보존을 위해서 새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이 따랐으면 좋겠다. 이로 인해 한국을 대표하는 전통공예에 대한 관심이 증대되고 적극적인 후원이 많아지면 우수한 우리 문화를 배우고 이어가려는 젊은 세대가 늘어나리라 생각한다. 이토록 아름다운 우리 문화예술이 서서히 사라져가는 것이 너무나 가슴 아프다”고 말하면서 전통 나전공예의 명맥을 위한 긴 여운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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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혜선 기자  ability0215@mjk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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