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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잔 다르크’유관순 열사“대한독립 만세”외친 독립의지 후세에 길이 남아
강경윤 기자 | 승인 2013.03.11 11:10|(156호)

[정경뉴스=강경윤 기자] 1919년 3월 1일 한민족이 일본의 식민통치에 항거해‘대한독립 만세’를 외치던 날. 유관순 열사는 이화학당의 담을 넘어 탑골공원까지 나가 독립만세운동의 중심에 섰다. 한국의 잔 다르크로 불리는 유관순 열사는 감옥에서도‘대한독립 만세’를 외치며 옥중 동료들을 격려했고 그때마다 모진 매와 고문을 당했지만 대한 독립의 뜻을 결코 굽히지 않았다. 그러나 체포 당시 입었던 상처와 일제의 계속된 고문으로 그토록 목놓아 부르던 조국의 독립을 보기도 전인 1920년 9월 28일 오전 8시 20분, 19세 꽃다운 나이에 서대문형무소의 어두운 감방에서 순국했다. 제94주년 3·1절을 맞아‘한국의 잔 다르크’이며 ‘3·1운동의 꽃’ 유관순 열사의 독립운동의 발자취를 되짚어본다.

   
▲ '한국의 잔 다르크' 유관순 열사.

유관순 열사는 1902년 12월 16일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병천면 용두리(옛 지명은 충청남도 목천군 이동면 지령리)의 작은 마을에서 유중권 씨와 이소제 여사 사이에서 3남2녀 중 둘째 딸로 태어났다.

유 열사는 어려서부터 아버지로부터 유교적 전통과 충효정신을 배웠고, 일찍이 기독교에 입문한 가족들의 영향을 받아 어려서부터 신문화를 접하면서 교육에 대한 꿈과 민족정신을 키워왔다.

당시 목천군 일대는 산세가 험한 곳으로 독립군이 활발히 활동했던 지역이었다. 유관순 열사는 이 지역에
서 국채보상운동과 같은 애국운동뿐만 아니라 독립군 활약상을 자주 보고 들으며 자랐다.

유관순 열사는 한번 옳다고 생각하는 일은 굽히지 않고 관철하고야 마는 성격을 지녔다. 이러한 성장과정을 통해 기울어가는 조국의 국권회복을 위해서는 희생정신이 필요하다는 굳은 의지와 신념을 키우게 되었다.

이화학당의 장난기 다분했던 소녀

유관순 열사는 선교사 부인인 Mrs. Alise H.Sharp의 배려로 사촌언니인 유예도(柳禮道)와 함께 미션스쿨인 이화학당에 편입학하게 되었다.

유관순 열사와 함께 이화학당을 다니며 5년간 같은 기숙사생활을 했던 보각 스님(1904년생, 속명 이정수)은 유관순은 지기 싫어하고 고집이 세며 때론 소녀다운 장난기가 다분한 아이였다고 말했다.

이화학당 기숙사는 공부종을 친 다음 자기 전에 기도종을 치면 방에 있는 사람들이 돌아가며 기도를 하게 되어 있었다. 그 날은 유관순이 기도하는 날이었는데 유관순은 기도를 끝낼 때“예수님의 이름으로 빕니다.”하는 것을“명태 이름으로 빕니다.”라고 하였다.

친구들은 모두 배를 잡고 웃었고 이 소리를 듣고 사감 선생이 달려와 이 방 학생들에게 품행점수를 낙제점을 주었다고 한다. 유관순은 보각 스님 집에서 보내온 명태반찬이 하도 맛있어서 명태 생각에 그렇게 기도했다고 하여 친구들이 다시 한 번 웃게 만들었다고 한다.

또한 유관순 열사는 매우 적극적인 성격의 소유자였다. 한번은 친구와 한밤중에 태극기를 70여 장이나 그려서 서양 선교사의 방과 기숙사 학생들의 방,그리고 교실마다 붙였다. 이로 인해 다음 날 소동이 일어났으나 이 사건을 계기로 유관순 열사는 정확한 태극기 그리는 법을 배우게 되었다.

   
▲ 1919년 3월 1일 종로에서 만세운동에 참여하고있는 군중들.

유관순 열사와 이화학당 6인의 결사대

이화학당은 바람 앞의 등불처럼 스러져가는 나라의 운명을 일깨우기 위해 매주 금요일 저녁 이문회(以文會)를 통해 사회 저명인사를 초빙하여 시국에 대한 강연을 듣기도 하고, 토론을 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환경에서 성장하던 유관순은 5인의 결사대에 참여하여 조국 광복을 위한 활동을 시작하였다.

1919년 1월 21일 고종의 서거는 전 민족을 울분의 도가니에 빠지게 만들었으며 이화학당의 학생들은자진해서 상복을 입고 휴교에 들어가게 되었다. 결국 국민의 울분은 3·1 운동을 촉발했다.

당시 수많은 학생들은 3월 1일과 3월 5일에 일어난 서울 지역 만세시위운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이화학당의 이문회에서도 2월 28일 열린 정기모임에서 3월 1일에 전교생이 소복을 입고 대한문(大漢門) 앞에 나가 망곡(望哭)을 하고 만세 대열에 참여한다는 것을 결의하였다.

학생들 가운데 일부는 비밀결사대를 조직하여 3·1만세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으며 유관순 열사도 이 비밀결사대의 일원으로 참여하였다.

유관순 열사를 비롯하여 학우 6인의 결사대는 기숙사 뒷담을 넘어 파고다 공원으로 가서 만세를 불렀다. 3월 5일 서울역에서의 만세시위에서 유관순 열사도 체포되었으나 곧 석방되었다. 일제는 학생들의 맹렬한 시위에 놀라 3월 10일 전국적으로 휴교령을 내렸고, 유관순 열사는 고향인 목천군으로 내려왔다.

아우내 만세운동의‘잔 다르크’, 유관순 열사

고향에 내려온 유관순은 이제 고향 사람들에게도 만세시위의 불을 지펴야겠다고 마음먹고, 우선 교회른들이 모인 자리에서 그동안 서울에서 있었던 사실을 이야기하며 숨겨왔던 독립선언서를 내놓았다.

1919년 4월 1일 아우내 장터에는 이른 아침부터 사람들이 모여들어 마침내 3000명이 넘는 군중이 모였다. 유관순은 군중들의 행렬을 정돈하며, 길목에서 광주리에 숨겨온 태극기를 일일이 나누어주고, 행렬의 선봉에 서서 소리 높여 독립만세를 부르짖었다.

프랑스의 순국 소녀 잔 다르크처럼 국가를 위하는 인간이 될 수 있도록 이끌어달라고 기도하던 평소의 꿈을 실현하고자 하였다.

행렬이 장터 복판에 이르자 쌀 섬 위로 올라가 우리의 독립의 중요성과 반드시 독립을 쟁취해야 함을 연설하며 군중을 독려하였다.

“여러분! 우리는 반만년의 유구한 역사를 가진 나라입니다. 그러나 일본은 우리나라를 강제로 합방하고도 온 천지를 활보하며, 우리에게 가진 학대와 모욕을 가하였습니다.

10년 동안 우리는 나라 없는 백성이 되어 온갖 압제와 설움을 참고 살아왔지만 더 이상 참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나라를 다시 찾아야 합니다. 우리는 독립만세를 불러 나라를 찾읍시다!”

어느새 이 소식을 듣고 달려온 일본 헌병의 저지에도 불구하고 만세운동은 계속되었다. 이때 유관순의 부모님은 왜병의 총에 살해당했다. 결국 유관순은 사랑하는 부모님 두 분을, 이날 모두 잃고 만 것이다.

뿐만 아니라 유관순도 일본군에 체포되었다. 그리고 이날 이곳에서 만세를 부르다 순국한 분은 모두 19명이나 되었다.

   
▲ 천안시 유관순열사박물관에 위치한 동상.

유관순 열사의‘독립의지’, 후세에 길이 남다

유관순은 천안 헌병대를 거쳐서 공주 재판소로 넘어갔다. 일제 경찰은 유관순에게 갖은 고문을 하였다. 처음에는 어린애로 생각하고 배후를 추궁해 보았으나, 굳게 다문 그의 입술은 주모자가 자기라는 것 외에는 더 말하지않아 아무 비밀도 알아낼 수가 없었다. 그녀는 법정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한국 사람이다. 너희들은 우리 땅에 와서 우리 동포들을 수없이 죽이고 나의 아버지와 어머니를 죽였으니 죄를 지은 자는 바로 너희들이다. 우리들이 너희들에게 형벌을 줄 권리는 있어도 너희는 우리를 재판할 그 어떤 권리도 명분도 없다.”

유관순 열사는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다. 6월 30일 경성복심법원은 초심법원인 공주지방법원의 판결에 대해 일부 무혐의 처리를 하고, 형을 감량하여 징역 3년을 언도하였다.

유관순 열사는 안중근 의사가 여순에서 상고를 포기하고 1심만으로 사형을 맞은 것과 같이 日人의 재판을 거부하여 고등법원에 상소함을 포기하였다.

유관순 열사는 일본인들이 판을 치는 이러한 세상에서는 삶의 가치를 찾을 수 없다는 마음으로 죽음을 각오하고, 옥중에서도‘대한독립 만세’를 외치며 동지들을 격려했다. 유관순 열사는 그때마다 죽도록 매를 맞았으나 끝내 굽히지 않았다.

유관순 열사는 결국 오랫동안 계속된 고문과 영양실조로 1920년 9월 28일 오전 8시 20분 서대문 형무소에서 그렇게도 목메어 외치던 조국의 독립을 보지 못한 채 꽃다운 나이 19세에 어두운 감방에서 순국하였다.

ggangky@mjknews.com 

강경윤 기자  ggangky@mjk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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